감자

감자

임경헌│국문· 09


박스를 열자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어둠의 환영들, 그 속에서 가슴에 파란 봄을 맞이한 감자들

싹이다, 종이박스 안이 연초록이다 지난겨울, 베란다 한구석에서 뒹굴다 눈을 뜬 감자 몇 알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 발견한 박스 안에서 양육을 하고 있다 차가운 기운이 가시자 몸 안의 본능이 꿈틀꿈틀 살갗을 비집고 나온 걸까, 단단하던 몸은 바람 빠진 공같다 나날이 허공으로 손을 뻗는 자식들에게 피와 살을 물려주며 굵은 주름이 늘어난 감자 지난 세월에게 한 움큼 물기를 빼앗기고 제 새끼들에게 모두 내어주는 동안 한 줌 속은 텅텅 비어간다 파랗게 독만 남은 어미가 마지막 젖을 물린다

어둠이 불러온 습기를 마시며 봄을 틔운 감자들, 생선가시를 바르듯 바스러져가는 껍질마저 내어주는, 아아 어머니




봄은 탄생과 소멸의 계절입니다. 감자는 해마다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리고 또 해마다 소멸합니다. 봄은 탄생과 소멸의 교대식으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이 시는 탄생의 기쁨보다 소멸의 기쁨에 주목하고 있군요. 새롭게 태어나는 새끼들에게 제 몸을 바치는 아름다운 소멸의 어머니로 감자를 읽어내고 있군요. 이 봄 어머니를 잡아먹고 자라는 새끼들로 세상은 환하게 술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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