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기분이 약간 반감되긴 하지만 역시 캠퍼스는 활기에 넘쳐야 제 멋이 살아나는 것 같다. 조용하던 강의실이 북적거리고 점심 시간이 되자 방학 기간 한산했던 식당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필요한 책이 있어 구내서점에 갔는데 새 학기 교재를 구입하려는 학생들에 밀려 다음 기회를 빌리기로 했다. 오랜만에 서점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면서 문득 읽기와 보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난 시절 우리의 내면 기억을 살피면 공부는 곧 책을 읽는 것과 등가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책 읽다가 걸리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 책 읽는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하여튼 공부의 대부분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서양이 한가지여서 아직도 영어에서는 강사나 교수를 ‘리더(책 읽어주는 사람)’이라 부르고 우리 어른들은 서당이나 학교에 가는 것을 ‘글 하러 간다’라고 칭했다.     
우리는 흔히 문화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문화는 곧 우리 인간들의 삶이며, 그것을 대표하는 것은 곧 책이다. 문자는 대량의 정보를 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보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책 출판을 그 사회의 문화 수준의 척도로 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속 활자를 세계 만방에 자랑하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을 세계적인 문화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각 시대별로 그리고 각 지역별로 독특한 출판 문화가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조선 시대는 학문을 근간으로 하는 양반 사대부들이 사회를 이끌어가던 때라 문자나 출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지금도 산소의 묘비들을 살피면 하나같이 ‘학생....’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이도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행위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하긴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고 외쳤던 맥루한의 통찰도 벌써 반세기전의 일이 되었다. 요즘은 읽기보다는 보기가 대세를 이루는 것으로 파악된다. 수업에서도 멀티 미디어가 도입되고 강사들은 교재가 되는 책의 선정이나 독해보다는 수업에 사용할 파워포인트 작성에 바쁘다. 학생들도 차분히 앉아 책 읽는 시간보다 컴퓨터에 앉아 검색하고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상의 다반사가 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추세는 더욱 일반화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런 추세에 저항하며 학생들에게 이제 보기를 그만두고 읽기로 돌아오라고 외칠 생각이 없다. 그만큼 보기가 현대에서 중요한 지적 활동으로 승격되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보기를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자산이 될 수 있는지, 읽기를 보기로 완전 대체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서로 나누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한창훈┃사범대·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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