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학문 간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취지의 ‘통섭(統攝: consilience)’이 학계나 기업의 화두가 된 지 꽤 되었다. 요체는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분화를 종결짓고 경계를 뛰어 넘는 지식의 큰 줄기를 잡자는 것이다. 현대의 어느 특정 학문은 다른 학문의 성과에 기대고 있는 경우가 많고 여러 학문들이 각각의 영역에서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에 한 분야의 우물만을 파서는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지식의 통합이 시대의 요구임에 반해 우리의 교육은 고교에서부터 이미 문과와 이과로 분리되어 있는 구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분은 인문사회계와 이공계열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에서도 연장되었다. 자연과학적인 지식이 없는 문과 출신들은 과학적 방법론에 서투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인문학적인 소양이 없는 이과 출신들은 세계나 인간에 대한 무지 또는 편협함으로 인해 양질의 삶을 향유하지 못할 뿐더러 엉뚱한 방향의 학문적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거창하게 통섭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우리대학을 포함한 최근의 대학 신입생들에게 있어서 교양의 빈곤과 기초의 부재가 크게 문제시 되어왔다. 대학은 기본적인 교양의 토대 위에서 보다 심화된 전문적인 지식을 함양하는 터전인데 고등학교 때까지의 교육이 빈약하다 보니 대학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 대학은 우리 학생들의 지적 능력이나 창의력, 연구력을 향상시켜 대학의 경쟁력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늦었지만 독서교육을 통해 ‘통섭’을 겨냥한, 교양의 토대를 다지기 위한 제도의 신설이 필요하다. 대학본부에서 전체 대학생들의 공통 도서목록을 결정하고, 단과대학과 학부(과)에서는 별도로 학문 분야에 필요한 도서목록을 정해서 학기 단위 또는 학년 단위로 독서를 지도하고 이를 확인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독서 졸업인증제의 형식으로 시행하여, 졸업 자격과 연계시킨다면 큰 효과를 거두리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제도가 우리 대학에서 처음으로 시행되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제도를 도입했다가 현재는 유야무야가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대학이 취할 것은 제도 자체의 포기가 아니라 제도의 바람직한 운용에 대한 모색이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제도에 의한 의무적인 독서가 학생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박탈해 버릴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강요에 의한 독서가 학생들의 창의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자질 향상과 경쟁력 함양을 위해 독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만 형성된다면, 하지 않는 독서보다는 강요된 독서가 더 낫지 않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야기하는 공대생, 상대성원리나 브라운 운동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인문사회계 학생들을 만나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나 {돈키호테}에 대해 말하는 자연대 학생에게 물리나 화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러한 독서교육이 성공적으로 잘 수행된다면 우리대학 캠퍼스는 통섭을 위한 하나의 커다란 세미나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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