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문학동네

실제 삶과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은 항상 괴리가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 괴리를 느끼는 건 아니다. 괴리가 크면 클수록 괴리가 없다고 합리화하고, 또는 그것을 감추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괴리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고 크다는 걸 깨닫는다. 모든 것을 삼키는 함정이다. 항상 자신 옆에 그 큰 틈이 존재했지만, 보지 않은 척했을 뿐이다. 그러니, 생각보다 큰 함정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던 함정이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친구 클라이브와 버넌은 우정을 걸고 약속한다. 상대방이 인간의 품위를 잃고 살고 있다면, 한 친구가 책임지고 안락사를 허용하는 암스테르담에 데리고 가자고. 그리고 두 친구는 약속을 이행한다.

서로가 보기에 친구의 삶이 이미 인간의 품위 따위는 없는 삶을 산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두 친구는 서로에게 죽음을 선물한다. 우정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기이한 상황이다.

클라이브가 보기에 버넌은 죽어 마땅하지만, 자신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버넌이 보기에 클라이브가 죽어 마땅했을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사건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클라이브는 남자가 여성을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그냥 지나쳤다. 버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신문을 이용했다. 이 두 사건이 죽어 마땅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친구에게는 친구가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시기와 질투, 그리고 배신이 가득한 관계에서 아주 작은 실수도 큰 실수로 변하고,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에서는 큰 실수도 작은 실수로 변한다. 그렇게 두 친구는 우정을 걸고 서로의 잘못을 죽어 마땅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관계의 회복은 결국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타인의 삶을 자세히 보고, 비난하고, 타인이 죽어 마땅하다고 판결하는 그 잣대를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 물론, 그건 힘들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 타인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판결하는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폭력을 숨기고 있는지 말이다.

둘은 더 이상 친구 관계가 아니다. 권력 관계다. 각자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 다른 말로 하면 도덕적, 사회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권력은 막강한 물리적 힘에서도 나오지만, 진리와 도덕적 우위에서도 나온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은 물리적 힘보다 더 가차 없을 때가 많다.

그렇게 내가 도덕적 우위에 있지 않더라도, 판단하는 순간 내가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한다. 우리 모두 작게, 또는 크게 그런 권력에 심취해 있는지도 모른다. 끝없이 누군가를 판단하면서 댓글을 남긴다. 나보다 많은 힘을 가진 권력자를 향한 자신의 권리 찾는 저항이 아닌, 나보다 힘이 없는 상대에게 향해 판단과 정의를 들이대면서. 그 힘에 취해서.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죽음을 선언한다. 인간의 품위를 잃었을 때

강성훈│독립서점 카프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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