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 화백의 '양화전'(경성일보, 1928년 12월 6일자 기사)

춘곡 고희동은 지난 1909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0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고 한국인 최초로 서양화를 배운 제1호 서양화가다. 또 전북에서는 전주 출신 청람 이순재(李淳宰, 1904~1958)가 1920년대 초 일본 유학 길에 올라 일본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1928년 제7회 조선미전부터 3회 입상하며 서양화가로 활동한 것이 최초다. 이렇듯 이때의 화가들이 서양화를 접하거나 배울 수 있는 통로는 대부분 일본 유학이라는 특수한 경우였다.

한편 당시에는 국내로 유입된 일본인 화가의 사설 미술교습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시미즈 도운(淸水東雲, 1869-1929년경)은 일찍이 경성에 자리 잡은 일본인 화가로 덕수궁 뒤 정동에서 살면서 사진관과 화숙을 경영하며 제자를 양성하고 서양화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설교습소 숫자와 화가들이 활동한 지역은 극소수였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보편적인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서양화의 보급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결론적으로 국내에서 서양화의 일반적 보급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학교가 설립되면서 전국적으로 배치된 일본인 미술 교사들의 교육을 통해서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 가장 먼저 학교 교육을 장악했다. 식민지 정책을 효과적으로 세뇌하고 실현하기 위해 많은 공립학교를 만들어 어린 학생들부터 황국 시민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이후 일본으로 유학 간 학생들은 일본어의 어려움이 없어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에서 온 다른 유학생들과 달리 일본학교에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있다.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시작으로, 평양, 대구, 부산 등에서 관립 중등학교가 세워졌고, 지난 1921년에 설립된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는 많은 화가를 양성해내며 미술로 가장 주목을 받았다. 전주에서는 1919년 전주고보(현 전고)가 설립되면서 1925년에 삼린평(森麟平, 모리린페이)이 부임했다. 그는 일본 문부성 미술공모전에서 입상 경력이 있는 화가로서 그 외 잘 알려진 것은 없지만, 총독부에서 전주지역의 정책적 교육 장악을 위해 신경 써서 배치한 인물이라고 한다. 화가 오지호(전 고 중퇴), 김용봉, 허병, 서정주 등이 당시 전고 출신들이다.

1926년 설립된 전주여고보에는 1929년 블란서 유학파 대진일차(大津逸次, 오쓰 이쯔지, 1891-1961)가 부임했다. 오쓰는 구마모토현 야마가시 출생으로, 지난 1915년에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해 오카다 사부로스케와 와다 산조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졸업 후 지난 1924년 문부성 유학생으로 선정돼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유럽 등을 여행했고, 특히 이때 야수파 화가 마르케(Albert Marquet, 1875- 1947)에 심취했다고 한다. 일본 귀국 후 잠시 고향에서 생활하지만, 지난 1928년 사생 여행을 위해 조선으로 건너와 종전까지 전주에서 미술 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한편 조선에서 유럽을 다녀온 오쓰에 대한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고, 지난 1928년 12월 6일자 『경성일보』에는 ‘오쓰 화백의 양화전’ 개최라는 기사가 실렸다. (위의 사진)

지난 1923년 개교한 전주사범학교에는 1937년부터 복택광(卜澤廣, 우리지아 히로시)과 이동정명(伊東正明, 이토 마사아키)이 미술교사로 활약했고, 이들은 금릉 김영창, 한소희, 유경채, 고화음 등을 배출시켰다. 이렇듯 부정할 수 없이 전북 근대사에 있어 일본인 미술 교사들을 통해 새로운 미술학도들이 배출됐고 서양화의 뿌리가 형성되면서 정착했다. 전통적 화숙 체계에서 근대식 미술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던 화가 지망생들에게 그들은 서구적인 미술 교육의 첫걸음이었다고 할 만큼 중요한 발자취였다.

김미선 | 예대 강의전담교수·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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