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름 키퍼, ‘가을 Herbst’ 대전 헤레디움 미술관 전시광경, 2023

“이 작업의 시작은 (중략) 제가 10년 전쯤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갔었을 때입니다. 때는 가을로 정말 멋진 날이었어요. 떨어지는 낙엽들과 형형색색 꽃 피운 나무들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 최고의 가을날 이었어요. 저는 그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 사진은 이번 전시의 출발점입니다” (작가의 전시 인터뷰 중에서)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 (An se lm Kiefer, 1945~ )의 '가을 Herbst'展이 9월 8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대전 헤레디움 미술관에서 개최된다. 키퍼의 최신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런던의 가을을 소재로 작가만의 독특하면서도 개성적인 특성인 ‘납’ (정확하게는 납으로 조형된 낙엽들과 숲 풀), 하늘과 땅으로 공간을 이분하는 ‘지평선’, 초(超) 현실적인 실재성을 부여하며 화려하게 덮어진 ‘금박’의 캔버스 그리고 건물 축조의 시작이자 동시에 끝의 폐허를 담아낸 ‘벽돌’ 더미를 보여준다. 특히 키퍼의 작업에서 벽돌 더미는 상징화된 ‘집’ 구조물로서, 인간의 생애이자 역사와 문명의 은유이자 생성과 소멸을 대표하는 구성물이다.

키퍼는 직접적인 전쟁을 겪은 세대 는 아니었지만, 유년 시절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무너진 집터들을 경험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거대화면에 거친 토양과 지푸라기, 말라 비틀어진 나뭇가지 등 인간이 사라진 황폐화된 풍경을 전통적인 투시법으로 표현하고, 여기에 오늘의 실존적 감각을 복합적으로 수용해 은유적으로 구성했다. 다시 말해 그의 형식적 기법은 전통적이지만 내용은 집념적으로 독일의 역사, 그중에서도 히틀러의 제국 시대, 특히 2차 세계대전의 독일 패망과 관련된 수수께끼처럼 풀리 지 않는 의문들을 제기한다. 자유분방하게 확장된 작가의 세계는 재료에 있어서 흙과 나뭇가지, 지푸라기뿐만 아니라 납과 금박까지 다양하게 사용해 화면 위에 붙이고 드리핑하고 얼룩지게 표현했다. 결국 키퍼는 역사 비판적인 내용과 독특한 형식의 완벽한 결합을 통해 예술적으로 금기시된 독일 역사를 효과적으로 회화적 감동으로 승화시켰다.

이와 같은 직설적이면서 은유적인 키퍼의 세계관은 실존적 경험의 ‘자연의 재발견’에서 정화된 것이다. 키퍼는 이데아 즉 정신은 자연의 모든 물질에, 돌 속에, 나뭇잎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한 자연에 있는 모든 물질의 정신은 “이미 사물 속에 들어있기에 예술가는 그것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사물들을 쪼개 그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의미가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밖으로 이끌어내서 보여주는 보편 의 공간”인 것이다. 작가는 관념적인 미술이나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추상미술의 형식에서 벗어나 무엇보다도 감상자와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가치를 표현하고 소통될 수 있는 구상적인 재현 형식을 취했다.

가장 보편적이면서 일상적인 계절의 순환, 자연의 순환에서 소중한 삶의 선물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 앞에서 어찌 감동을 안할 수 있으랴. 이렇듯 키퍼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경이로운 자연의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납을 금으로 만들어냈던 중세 시대 연금술사처럼.

김미선 | 예대 강의전담교수·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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