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극치, 완벽한 미의 대상. 또는, 완벽해야만 하는 대상.

과연 그런 존재가 있을까요? 사실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질문은 어리석습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이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는 그런 존재를 내가 믿을 수 있느냐, 믿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믿는다면 똑같이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믿는다를 선택했다’, ‘믿지 못한다를 선택했다’로 선택 영역으로 변하죠. 강요에 의한 선택일 수도 있고, 스스로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의지가 들어간 선택입니다. 강압이든, 무의식이든 우리는 선택하고, 동시에 선택당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에게 금각사와 같은 존재가 있나요? 저는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지금 저에게 금각사는 제가 선택한 삶의 방식입니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금각사고, 이 금각사는 언젠가는 불태워질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고수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살아내기 위해서 많은 수정을 거쳐 왔습니다. 마치 주인공이 금각사를 차츰 더 아름다운 미의 대상으로 승화한 것처럼요.

거짓을 믿고, 또는 뻔히 보이는 허구를 외면하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고 믿으면서, 삶의 방법을 터득했어요. 터득이라고 하지만, 사실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눈을 가리고 믿는 거지요. 거대한 합리화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깨진 적도 있습니다. 그것을 금각사처럼 깡그리 불살라져 버렸죠. 그 잿더미 위에서 다른 삶을 키워냅니다. 만약, 내가 만든 금각사가 완벽했다면, 제가 그 금각사를 태워버렸을 때 저는 살지 못했을 겁니다. 완벽함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살아있고, 주인공도 마지막에 삶을 선택합니다.

혹자는 금각사를 성장소설로 보기도 합니다. 금각사를 태우고 삶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주인공의 성장이라고요. 일면 동의하면서도,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성장한 사람의 금각사는 사회적인 틀과 관계에 잘 적응하는 형태로 만들죠. 하지만 주인공이 처음 금각사를 만들었던 방법, 비도덕적이고 충동적이며 괴기스럽고 파괴적인 방법은 사라질 겁니다. 금각사를 태우고 죽으려고 했던 그 충동은 더 이상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장이라는 말에 동의를 못 합니다. 다른 면에서 보면 후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주인공은 한층 더 세련되고, 다르게 표현하면 사회적 틀에 맞는 금각사를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어른이 된 것처럼요.

강성훈│독립서점 카프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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