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발생했다. 지난 10월 15일 SPC 공장 사고에 이어 이태원 참사까지 무고한 목숨이 많이 희생됐다. SPC 공장 사고는 20대 여성이 소스 배합기에 끼어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사고이고, 이태원 참사 사고는 총 158명이 압사로 숨진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희생자의 대부분이 20대였다는 점에서 내가 겪을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나만 아니면 돼’,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처럼 이기적인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은 품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미세한 죄책감이 이어진다. 안타까운 목숨을 애도하지 못할망정 안도가 먼저인, 이기적인 내가 싫어진다. 사건의 주요 인물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돌고 돌아 마침내 나를 갉아먹는다.

이태원 참사 이후 당시 현장을 간접적으로 시청함으로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시민이 다수 발생했다. 필자 역시 다양한 매체에서 유포되는 당시의 현장 사진과 영상을 끊임없이 보는 것을 멈추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영상을 시청함으로써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자연스레 죄책감이 따라오게 되면서 영상 매체를 시청한 것만으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이번 이태원 참사 이후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울적하고 불안한 심리 상태가 계속된다면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를 권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에게 책임과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놀러 갔다 죽은 것이니 애도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말이 왜 이렇게 슬프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방식은 분명 잘못됐지만, 저 외침이 그들만의 애도 방식이지 않을까.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 뒤에 따라오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회피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본인도 알고 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그 슬픔과 죄책감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말이다. 애도의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헌화할 수도, 편지를 쓸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필자는 이 글을 작성하며 그들을 애도한다.

내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안에는 안도감과 죄책감이 공존한다. 이 안도감과 죄책감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 변화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이는 쉽지 않다. 그러니 죄책감에 빠져 자신을 갉아먹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이민서 | 간호·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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