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 속으로 눈송이 하나가
- 최윤정 동국대학교 문예창작 4

“내가 해고된 이유는 빨간색 때문이야. 오늘 하루 유달리 눈에 많이 띄었는데…”

인숙은 빨간 매니큐어를 뜯으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듣고 있는 척했다. 벗겨진 네일 사이로 드러난 손톱을 가리기 바빴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톱이 창틀에 쌓인 더러운 눈 더미 같다고 생각했다.

“내 말 듣고 있어? 정리해고자에 내 이름이 빨간 글씨로 써진 게 우연일까? 당신이 온 집안을 빨갛게 인테리어 해서 그런 것일지도… 오죽하면 술자리에서 농담으로 직원들이 나를 빨간 넥타이라고…”

남편이 그녀에게 불평했다. 인숙은 말없이 김치를 잘게 썰었다. 인숙은 빨, 입안에서 쌍비읍, 무언가 삐읍이라고 발음하고 싶은 글자를 굴려보았다. 숨을 쉬듯이 뻐끔뻐끔. 가시처럼 위로 솟은 글자가 입천장을 찌르는 거 같았다. 빨, 그녀는 립밤을 바르는 습관이 있었다. 빨, 주머니가 달린 옷마다 딸기 맛 니베아를 넣어 놓았다. 립밤을 바르는 습관이 먼저인지 빨강이 먼저인지 모르는 인숙의 입술은 번들거리기만 했다.

김칫국물이 인숙의 손가락에 튀었다. 인숙은 곧바로 엄지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을 빨자 본인의 한쪽 가슴을 빨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 3개월 뒤쯤. 거실에 있는 수동식 착유기로 그녀의 모유를 뽑아내는 상상도 같이. 초유를 먹으면 똑똑해진다는 말과 그러면 자신이 먹어야겠다는 남편의 말이 함께 떠올랐다. 인숙은 농담처럼 그래, 라고 답했었다. 언어 능력이 늘지 않을까? 아마 그가 머리숱이 많았을 때쯤, 남편은 중국 지사 발령을 위해 중국어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그녀의 가슴을 빨곤 했다. 모유가 나올 수도 있다면서.

인숙에게 또한 빨강은 두려움이자 호기심이었다. 색맹은 유전된다는디…… 라는 한대수 씨의 엄마, 인숙의 시어머니는 남편처럼 항상 말끝을 흐렸다. 모자의 말투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종결되지 않은 문장은 인숙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으며, 인숙은 그 끝을 상상하곤 했다. 본인의 유전자를 받은 아이가 빨강을 못 본다면 어쩔지. 전색맹은 아니어도 적록색맹이면 어떨지. 인숙은 궁금했지만 아이의 성별을 알고 싶진 않았다. 남자아이면 색맹, 여자아이면 정상. 그녀는 10개월 동안 무지한 채 살고 싶었다. 반반이라는 확률은 인숙을 7개월 동안 지탱했다. 지금은 눈을 감고 있으니까 아이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아이가 자궁 속을 빠져나와 눈을 처음 뜬 순간 나를 보고 울겠지. 그 울음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인숙은 어느 순간 무색의 세상 속 색깔이 모두 빨강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불평은 적정선에서 마무리됐다. 묵은지보다 갓 담근 김치가 더 좋다는 말을 끝으로. 빨간색 때문에 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라벨 위의 흐려진 글씨처럼 그의 말끝 역시 모호했다. 인숙이 고춧가루와 설탕을 구별하기 위해 흑백의 혀를 내밀어 그것들을 맛보는 동안, 그녀의 세상은 하얗게 물들어갔다. 눈이 녹아 시커메지고 있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인숙은 도마 위에 놓인 김치를 마저 썰었다. 날이 무딘 칼을 세게 쥐고 누르다 그만 손가락을 베였다. 아... 하는 작은 탄성이 나왔다. 손끝에서 나온 피와 김칫국물이 뒤섞여 마치 큰 출혈이 난 것처럼 보였다. 도마 위에 낭자한 피, 범인은 누구? 찌개 안에는 인숙의 유전자 정보가 들어갔겠지. 인숙은 잘리다 만 김치를 그대로 냄비 안에 넣어버렸다, 자기 DNA와 함께. 냄비 뚜껑을 들자 맺힌 수증기가 뚝뚝 떨어졌다. 끓고 있는 김치찌개 소리만이 크게 들려왔다. 바지 밑단에 번지는 축축한 얼룩들같이 인숙은 무색의 공간에 스며들었다.

인숙은 식탁 위에 완성된 찌개를 올려놓았다. 일회용 수저 비닐을 이로 뜯은 뒤, 국물을 떠먹는 남자. 남자는 입가에 걸린 비닐 조각을 후- 하고 뱉었다. 그는 찌개를 뒤적거리며 꽁다리가 잘리지 않은 김치를 손으로 찢어 먹었다. 커다란 김치가 그의 입에 들어가자 인숙은 사타구니가 욱신거렸다. 남자의 정자가, 낯선 유전자가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 같았기에. 수정되지 않은 채, 몸속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는 느낌은 매번 태동과 함께 느껴졌다. 둥근 의자의 모서리에 허벅지를 비벼보아도 욱신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인숙은 립밤을 꺼내 발랐다, 아랫입술부터 시작해 윗입술 그리고 입가까지도. 무료 시술권으로 맞았던 보톡스처럼 인숙의 입술은 부풀어 올라 보였다. 사실 아이는 딸기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딸기 맛 립밤을 바를 때마다 태동이 거세졌기에. 아니다, 아이는 딸기를 좋아해서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딸기 맛 콘돔을 좋아했으니까. 그는 고무 냄새를 싫어했다.

인숙은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그를 바라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발목을 잡는 듯이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허벅지에부터 시작된 얼룩이 퍼져나가기 때문일까. 인숙의 몸은 옷장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인숙이 붙박이장 문을 열자 선반마다 적힌 라벨지가 보였다. – 노란색 – 주황색 … 그녀는 흰색 칸에 멈춰서 하얀 스키니진을 집어 들었다. 흰색 칸의 라벨은 곧 떨어질 듯 위태로웠다. 남편이 라벨을 일일이 붙이던 뒷모습이 생각났다. 코팅해서 라벨을 붙여주던 그와는 다르게 인숙은 손재주가 없었다. 옆에서 단면이 삐뚤빼뚤한 테이프만 뜯어 줬을 뿐, 남편이 가위질하고 코팅하는 모습을 지켜만 봤었다. 괜찮아, 각자 잘하는 일이 있는 거지. 그가 자주 해주던 위로였다.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라벨은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숙은 흰색이라 적힌 라벨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느새 코팅되지 않은 라벨과 자꾸만 번지는 글씨와 함께. 인숙은 옷장 문을 열고, 입고 있던 바지를 뒤집어 벗었다. 뱀이 허물 벗는 거 같다는 아버지의 꾸중에도 인숙의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의 호통에는 어머니를 흉내 내는듯한 느낌만 들었다. 인숙은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했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옷을 갈아입었다. 학교 갈 때, 친구와 놀러 갈 때, 도서관 갈 때. 옷이 같아서는 안 됐다. 저번 주에 입고 간 옷을 이번 주에 입는 법은 없었다. 9년 동안 영양사로 일했던 사립 중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조리복 때문이었다. 하얀색 모자와 옷. 그녀는 9년간 같은 옷만을 입은 채 살았다. 묻은 얼룩이 때로는 하나의 무늬처럼 느껴지는 정도, 새로운 옷을 입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수준까지. 인숙은 하얀색에 익숙해지는 것이 싫었다. 연봉이 더 낮다는 이유로, 이제 육아를 전담해야 한다는 이유로, 일을 그만두라고 들었을 때도, 남편이 광주에 내려가자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일종의 해방감과 동시에 낯설어지는 기분이었다.

때문에 인숙에게 있어 임신의 큰 불편함은 옷이었다. 펑퍼짐한 옷은 안 입는 게 그녀의 신조였다. 인숙은 임신 후에도 달라붙는 옷을 선호하곤 했다. 타이트한 옷을 입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사의 말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질식사해서 죽지는 않을 거니까. 아이의 사망 원인이 산모의 옷인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삐져나오는 살과 답답하게 쪼이는 옷의 불편함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불편함을 참는 일은 인숙에겐 쉬운 일이었다.

인숙은 주 3회 유튜브에서 임산부를 위한 요가 운동을 찾았다. “임산부 요가 말기”를 검색했다. 말기라니, 시한부 선고처럼 인숙은 현재 임신 말기였다. 그녀가 구독하고 있는 채널은 임신 39주 차 임산부가 주인공이었다. 핸드폰과 연결된 TV에서 동영상이 시작됐다. 임산부가 나와 짐볼 위에서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여자는 이번 동영상이 마지막 영상이라고 말했다. 커다란 짐볼이 여자의 엉덩이 아래 깔려 있었다. 인숙도 스포츠 브래지어와 레깅스를 입고 짐볼 위에 앉았다. 허리를 펴고 호흡을 내뱉으며 후하. 몸을 앞뒤로 움직이며 허리를 똑같이 움직여주었다. 골반을 부드럽게 해주고 회음부 마사지를 해주는 효과가 있다는 운동. 숨이 차올랐다. 과거에 웨이트 기구 운동과 10km 마라톤도 거뜬하게 했던 인숙이었다. 그녀에게 이제 유산소 운동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마라톤 동호회에서 남편과의 첫 만남, 나란히 한강을 뛰었던 첫 데이트는 까마득한 과거일 뿐이었다.

인숙은 땀에 젖은 운동복을 세탁기에 넣었다. 안에 있던 세탁물을 꺼내 건조대로 들고 갔다. 건조대에는 조그마한 옷들이 널어져 있었다. 공주 캐릭터 원피스부터 시작해 공룡 무늬 내복과 바지, 그리고 포대기까지, 건조대를 모두 차지한 상태였다. 모두 시누이가 주고 간 것들이었다. 시누이는 인숙에게 바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세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숙은 끝을 흐리는 그 집안의 특성상, 건조를 잘못했든가 세제를 다르게 넣었든가 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인숙은 아기 옷들을 품에 안고 소파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착유기와 분유 병들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12,900원, 쿠팡에서 산 수동식 착유기와 함께 온 3+1병들을 보자, 인숙은 유두 끝이 아려왔다. 소의 젖을 짜는 행위처럼, 누군가 자신을 꼬집는 느낌이 들었다.

인숙이 허리를 잡으며 일어났다. 그리곤 남편의 트렁크 속옷과 자신의 커다란 브래지어를 널었다. 허리를 숙일 수 없었기에 건조대의 아래 칸은 쓸 수 없었다. 건조기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항상 최저가를 검색하고 있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인숙은 매주 토요일이면 문화 센터에서 수영을 하곤 했다. 수영장은 집에서 10분 거리로 가까웠지만 택시나 버스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그녀는 뒤뚱뒤뚱 걸어가며 수영장으로 향했다. 상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볼 때면, 마치 그 꼴이 뭍에 나온 오리처럼 보였다.

인숙은 꽃무늬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유아용 풀에서 발을 먼저 담갔다. 심장이 놀라면 안 되니까. 물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항상 낯설었다. 인숙은 깊은 수위의 풀장에 걸터앉아 발끝을 또 적셨다. 넓은 풀장에 심장이 놀라면 안 되니까. 다음 주는 위아래 래시가드를 입어야지, 머리는 양 갈래로 묶어봐야겠어. 그런 다음 인숙은 실내 수영복을 입은 직장인과 중년의 무리가 수영하는 풀장에 들어갔다. 그들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림과 동시에 누군가를 염탐했다. 아줌마들은 웃통을 깐 남자 강사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움직였고, 아저씨들은 여자 강사의 뒷모습을 몰래 쳐다봤다. 물론 서로를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정분나는 상황이겠지. 임산부인 인숙을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인숙이 킥 판을 잡고 물장구를 쳤다. 숨이 찼다. 인숙은 그냥 물에 떠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둥둥, 그녀의 배가 동그랗게 떠올랐다.

인숙은 수영하고 난 뒤, 언제나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녀는 허기져도 먹고 싶은 것 특히 정크푸드 부류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소고기 안심이나 닭가슴살 따위의 고단백 식품이 인숙의 주식이었다. 또한, 비타민 C를 섭취하기 위해 과일 같은 건 먹지 않았다. 부족한 영양소는 영양제로 때우면 되는 일이었다. 당이 높은 과일은 즉, 달콤한 과일들은 모두 살이 찌기 때문이었다. 수박의 열량이 얼마나 높은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헬스 코치가 말해준 적당량은 큐브 모양으로 된 수박 3조각이었다.

인숙의 부푼 배가 꺼진 TV 화면에 비쳤다. 튼살 자국은 그녀의 다리에 퍼진 핏줄처럼 상체를 뒤덮었다. 인숙에겐 하지정맥류와 튼살은 같아 보일 뿐이었다. 부풀어 오름의 차이 정도. 인숙은 바지에 다리 한쪽을 넣고 한숨을 쉬었다, 낑낑거리며 반대쪽 다리까지 겨우 넣었다. 하지만 바지는 골반에서부터 걸렸다. 얼굴에 점점 땀방울이 맺히자 그녀는 붉은 목폴라를 벗어버렸다. 노 와이어 브래지어가 인숙의 가슴을 위태롭게 지탱했다. 그녀는 몸을 공중에 띄워 올리며, 소위 점프-라는 행위를 하며 바지를 올렸다. 퍼진 가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녀는 중력에 저항했지만 그녀의 몸은 바지라는 공간 안에 구겨 넣어지고 있었다.

반대편 옷장 문에는 – 빨간색(겨울)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서로 뒤엉켜 쌓여 있는 코트, 바지, 니트 스웨터, 수면 양말 등이 보였다. 얇은 스웨터를 꺼내려다 남편의 발소리가 들렸다. 인숙은 급하게 목폴라를 다시 입었다. 외출한다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거실로 나갔다. 이어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인터폰을 눌러 잘 다녀오라는 말을 했다. 복도에 그녀의 음성이 울렸다. 화면 속 남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꾸로 입은 폴라의 상표가 그녀의 목을 따끔하게 찔렀다.

집 안에 홀로 남은 인숙은 남은 임신 3개월을 어떻게 버틸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녀의 몸은 커져 나갔지만 속은 공허해졌다. 인숙은 뱃속에서 태아가 자신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허기지는 이유가 아이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다. 비둔한 껍질을 벗으면 새로운 여자가 나올 거라고 믿었다. 뱀이 허물을 벗듯이, 아이와 함께 배출되리라 생각했다. 인숙은 탯줄로 연결된 아이가 부럽기도 했다. 그녀의 배꼽은 움푹 들어간 채, 더 이상 영양소를 얻을 수 없었으니까. 어미라는 사람에게서 인숙이 얻은 건 탯줄로 받아먹은 식성뿐이었다.

*

 

어미는 생것을 좋아했다, 생간 육회 산낙지 같은. 인숙을 임신했을 때 특히 더 먹었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비싼 것만 처먹었다고 아버지는 욕을 내뱉곤 했다. 어미 역시 난임이었다. 그녀는 한국에 처음 들어온 인공수정의 성공으로 아이를 얻었다, 아니 잃었다. 첫째 오빠, 오빠라고 부를 기회조차 없었지만 첫째는 그녀의 뱃속에서 죽었으니까. 수술실에서 배를 절개해 꺼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인숙은 우연히- 아주 우연히도 임신 되었다. 그 당시 어미와 아버지는 이혼을 준비 중이었다. 추운 겨울날 합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가는 길목, 어미는 침대 위에서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다. 아버지의 강요에 의한 것인지 어머니의 결심인지는 몰라도, 이는 끝이 아닌 시작으로 갈 뿐이었다. 그렇게 인숙은 한 여인숙에서 우연히 착상되었다.

인숙도 병원에서 다리를 벌린 채 정자를 삽입 당했다, 그녀처럼. 처음에는 꼭 여의사가 있는 산부인과로 갔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관없는 문제였다. 새로운 의사를 만나는 일은 인숙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인숙의 목적은 한대수의 정자를 착상시키는 것. 희귀동물 보호를 위해 동물의 정액을 채취하고 교배시키는 것처럼, 인숙은 한대수의 정자를 받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병원에 가고 다리를 벌리고, 남편은 기력 보충의 이유로 인숙에게 날것을 먹이고. 아직 펄떡거리는 낙지를 볼 때면, 남편의 질 좋은 정자라고 불리는 생식세포들이 자궁에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입안에서도 움직이는 낙지다리의 빨판처럼 한대수의 정자는 착상되지 않은 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공수정은 9년간 성공하지 않았다. 시험관 아기를 시도하기에는 가격이 비쌌다. 1회에 인공수정을 10회나 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조화정, 그러니까 시어머니는 그 돈을 아까워하면서 착상 여부를 확인할 때마다 서울로 올라왔다. 자기 아들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시어머니가 왔다 갈 때면 꼭 남편에게 흑염소, 흑마늘 즙을 쥐여 주었다. 임산부에게는 좋지 않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동안 TV에선 육아 예능 붐이 일어났다. 남편에게 저녁밥을 먹으라고 부를 때면, 그는 언제나 육아 예능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늘 안전 매트로 뒤덮인 집안에서 뛰놀고, 어디론가 여행을 다니고, 인스턴트가 아닌 건강한 식사를 매번 하고. 성별과 나이 부모와 방송사만 바뀔 따름이었다. 인숙과 남편이 마주 앉아 식사하는 와중에도, 연예인 부모와 그 자식들은 오리 로스, 랍스터 버터구이, 민어회 등 어디서 파는지도 모르는 음식들을 찾아 먹고 있었다. 아, 왕십리에서 <삼둥이가 다녀간 오리 로스 집>이라는 현수막을 보긴 했었다.

인공수정이 실패한 원인은 확률이 낮아서라기보단 싼 게 비지떡, 즉 돈 때문이었다. 돈을 더 많이 써야 임신이라는 궁극의 목표, 누군가에게는 공짜일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었다. 50만 원과 500만 원. 10배 차이가 나는 가격이 이를 증명하듯이, 시험관 아기를 시도하자마자 그녀는 임신에 성공했다. 허탈한 성공이었다. 중도 해지한 적금 통장만 있을 뿐 인숙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창밖으론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풍경이 보였다. 3개월이라는 기간은 인숙이 적응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이곳 거실에선 저 멀리 장례식장 표시가, 안방에선 조선대학교 병원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남편은 중국이 아닌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나이가 많아서였는지 초유를 못 먹었다는 이유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계속 회사에 출근했다, 버틴다는 표현이 맞겠다. 명절날 남편 앞으로 온 선물도 없었다. 결국 이 집은 나중에 받을 퇴직금으로 사게 되는 꼴인가. 그러면 대출 이자는 안 내도 되겠네. 인숙은 다달이 내는 이자 문제와 이사 걱정이 사라진 것은 좋았다.

이사 올 때 가장 먼저 본 조건은 병원의 접근성이었다. 남편은 남광주역 근처에 대학병원이 있다는 이유로 근처 아파트를 얻었다. 이름에 무등산이 들어간 아파트였다. 남편은 건강해진 기분이지 않냐는 둥 아이에게 좋을 거라는 둥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신축이라 그런지 아파트에는 신혼부부가 많이 살았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지상 주차장을 만들지 않은 구조였다. 주민들은 모두 지하로 차를 운전하고 지하에서 출근하고 지하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삶이었다. 지상에는 손전등을 들고 순찰하는 경비원들이 아닌, 젊은 보안 요원들이 전동 킥보드를 타며 아파트를 순찰했다. 헬멧을 쓴 채로 도로에 쌓인 눈을 정리하고 정문에서 보초를 서고. 주택에서 살았던 인숙에겐 어색한 환경이었다. 주말과 퇴근 시간만 되면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나와 아파트 단지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특히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는 핸들이 어디로 튈지 몰라 무서웠다. 이 시간에 밖을 나가야 한다면 인숙은 꼭 남편과 함께 나가곤 했다.

인숙은 서울에서 지하철만 타고 다녔었다. 전철로 다니는 데 익숙해진 인숙은 역으로 향했다. 시댁에서 김장한다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인숙은 플랫폼 앞에 서서 노선도를 봤다. 검정 줄로 일직선, 지하철은 1호선밖에 없었다. 여기에선 환승이나 우회할 곳은 없었다. 쭉 직진만 할 뿐이었다. 사실 이 노선은 검정색이 아닐 수도 있었다. 빨갛게 한 줄로 그어진 길을,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향해 가는 기분이었다.

문이 열리자 서울 지하철과 다르게 빈자리가 많았다. 한 줄 전체가 노약자석이기도 했다. 일부러 배를 만지며 임산부석에 앉을 일도 없었다. 임신 초기 시절,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여기에선 받지 않았을 거 같았다.

“이번 역은 화정역, 화정역입니다.”

남편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었다. 자신도 열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멈추는 그곳이 자신의 종착지일 거라는 강한 믿음이 들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안내 소리가 들리자 인숙은 잠에서 깬 듯이, 서서히 일어나 내렸다. 인숙은 화정역에서 내려 시어머니 조화정이 사는 시댁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다.

“왔으면 고무장갑 끼고 언능 안거.”

문을 열자 젓갈 비린내가 거실에 퍼져 있었다. 동서 두 명과 시어머니 조화정이 거실에 모여 김칫소를 넣고 있었다. 빨간 고무 대야에는 김치가 소복이 쌓였다. 인숙이 들어오자 동서 한 명이 그녀에게 고무장갑을 건네주었다. 인숙은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어떤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쳐다봤다. 인숙은 립밤을 꺼내 천천히 입술에 발랐다.

조화정은 다음 달에 있을 시아버지 제사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는 광주 시청에서 시아버지를 만난 이야기, 최루탄이 터지는 밖을 피해 둘이 조화정의 집에 숨었다는 이야기, (아마 그날 한대수를 임신했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의심) 다음 날 군의 포격에 다리를 맞아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 (이후 발기가 잘 안됐을 거라는 의심) 병시중하며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는 이야기 (다른 남자가 있었을 거라는 의심) 변함없이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달라지는 건 중간중간 하는 의심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우리 대수가 말이여, 라는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내가 며느리를 키 세 개는 들고 와야 받아줬을텐디, 의사나 교사처럼 사 짜 이름은 달고 와야 됐는디, 고 년이 임신을 해서 결혼했다고, 초음파 검사를 하러 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상상임신 같은 걸 했다고. 화정은 하얀 배추에 회색빛의 양념 덩어리를 묻히는 과정을 반복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검게 뒤덮인 배추들이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애미야 뭐하냐, 라는 조화정의 질문에 인숙은 그제야 고무장갑을 받았다. 입에 고무장갑을 대고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는 인숙. 심폐 운동에 좋대요, 어머니. 연분홍색 고무장갑이 팽창 수축 팽창 수축을 반복했다. 조화정이 다가오자 인숙은 달라붙는 니트 스웨터를 들어 올려 자신의 배를 보였다. 가슴 아래에 옷을 끼운 채 맨손으로 밴댕이젓을 집어 먹었다. 밥 없어요? 라는 말을 던지며 찬장까지 뒤져 햇반을 찾았다.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1분 30초 동안, 집안에선 아이들의 핸드폰 게임 소리만 들렸다. 띵- 하는 경쾌한 음과 함께 인숙은 아예 식탁에 자리를 잡고 밥을 먹었다. 덜어놓은 김칫소부터 시작해 조기젓 밴댕이젓 작년 김장 김치까지 꺼내 먹어 치웠다. 거실에 쌓인 배추 더미에서 김치 한 포기도 꺼내 접시에 덜었다. 손으로 쭉쭉 찢어 입 안 크게 넣었다. 손에 묻은 양념을 빨며, 새끼손가락부터 엄지까지 쪽쪽 빨며, 큰 멸치액젓 통을 김장 매트 위로 쏟아버렸다. 소금 한 포대기도 냉장고 속 포도 주스도 도련님이 먹는 단백질 파우더도 오래된 인삼 담금주도 모두 넣어버렸다. 게임을 하고 있던 아이의 콜라까지 뺏어 매트에 부어버렸다. 동서들과 조화정이 말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의 부푼 배 때문이었다. 인숙이 그녀의 배를 깐 채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빵빵한 배는 인숙을 부르자마자 터질 것만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들어왔다. 김치 한 포기를 들고 있는 인숙과 김장 매트에 뿌려진 갈색의 멸치액젓 냄새 그 위의 그녀, 그리고 아들에게 달려오는 조화정. 남편은 매트 안에 서 있는 인숙의 손을 잡아 데리고 나왔다. 그녀는 마루에 찍히는 자신의 발자국이 까맣게 보였다.

 

조화정의 집에서 나와 화정역으로 가는 길. 남편이 인숙을 부축했다. 자기를 왜 도와주냐며, 내가 혼자 걷지도 못할 병신 같냐는 인숙의 질문에 남편은 묵묵히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인숙의 손톱 사이에는 고춧가루들이 끼어 있었다. 빨간 양념은 그녀의 벗겨진 네일을 가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남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삐이-하는 이명 소리처럼 그의 말은 흩어지고 있었으니까. 인숙은 손등으로 입술에 발린 립밤을 문질렀다.

“진짜 딸기를 먹고 싶어. 이 양산형 딸기 맛 말고.”

남편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양복을 입었다. 습관적으로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그는 제설 작업을 하지 않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이 그의 양복 바짓단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걸음은 인숙의 걸음걸이처럼 느려졌다. 지하철역에 도착한 그는 개찰구에 회사 ID 카드를 댔다. 카드를 다시 찍어주세요, 그는 뒤로 물러서 교통카드를 꺼내 찍었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타는 사람들은 없었다. 유령 열차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전철 안은 고요했다. 히터 바람이 강하게 나와도 자꾸만 발이 시렸다. 칸마다 듬성듬성 앉은 사람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패딩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아니었으면 그는 열차에 혼자 있다고 여길 뻔했다. 광주송정역에 도착하자 승객들이 하나둘 내렸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기차를 타고 남쪽을 향해 떠나는 건가. 이곳은 너무 추웠다.

평동역에서 내려 그의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회사 앞이었다. 늘 첫 번째로 출근했던 남편은 회사 로비로 들어섰다. 데스크에는 경비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의 ID카드로 들어가 보려 해도 경보음이 멈추지 않았다. 인식되지 않은 카드입니다. 카드를 계속 찍어보지만 바리케이드는 그를 끊임없이 막았다. 삐이 삐이 삐이하는 소리는 그치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경비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는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경비원이 점점 다가왔다. 남편은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넸다. 경비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죄송하지만 나가 달라는 말을 했다. 어떻게… 남편은 말을 흐리며 회전문 앞에 다가갔다. 웅- 웅, 돌아가는 회전문에서 찬 바람이 불어왔다. 남편은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어떤 타이밍에 들어가야 할지 그는 몰랐다.

“딸기 사 왔어, 먹고 싶다며.”

남편이 인숙에게 스티로폼 박스를 건넸다. 박스 안에는 딸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먹어.”

인숙이 입맛을 다시며 식탁에 앉았다. 딱 열 개만 먹는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핸드폰에서는 폭설 경보가 울렸다. 부엌의 작은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설탕도 뿌려줄래?”

남편이 싱크대로 딸기를 가져갔다. 셔츠 소매를 걷은 채 딸기를 씻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였다. 수압을 세게 틀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말소리가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사라졌다. 불룩 나온 그의 배가 젖어 있었다. 남편은 딸기 꼭지를 떼고 일회용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인숙은 박스 옆에 붙은 라벨을 봤다, 50% 할인. 그릇 위에는 물러진 딸기 몇 개가 섞여 있었다. 몇 개가 아닌 다수였다.

“다 상한 딸기들뿐이네.”

남편이 찬장에서 설탕 봉지를 꺼내왔다. 플라스틱 집게로 고정해 놓은 입구가 열렸다. 잘못 잘랐던 큰 구멍, 하나의 블랙홀 같은 구멍에서 하얀 설탕이 쏟아졌다, 펑펑. 물러진 딸기 위에 설탕이 쌓였다. 이제는 상한 딸기들이 구분되지 않았다.

인숙은 딸기를 입에 넣었다. 딸기 맛이 났다. 진짜 딸기는 너무나 달았다. 달콤함이 혀에 닿자 헛구역질이 나왔다. 목구멍까지 역류한 딸기를 눈감고 꿀꺽 삼켜버렸다. 아침으로 먹은 현미 시리얼 맛이 났다. 인숙은 일어나 접시에 남은 딸기를 싱크대에 넣어버렸다. 음식물 건조기를 틀자 딸기들이 뭉개졌다, 원래 뭉개진 것일지도. 수분이 사라진 딸기가 모두 으깨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인숙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냄새가 구역질을 재촉했다. 인숙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딸기, 혹은 그녀의 일부일지도 모를 것을 게워냈다. 변기에 딸기 조각 몇 개와 노란 시리얼이 둥둥 떠다녔다. 인숙이 물러터진 과일의 과즙처럼 액체를 뱉어낼 때마다, 자신의 배가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양수가 같이 배출되고 있기 때문일까. 목이 말랐다.

“웬일로… 평소엔 입덧도 안 하더니 왜…”

남편이 인숙의 등을 두드렸다, 물론 변기 쪽을 보지 않은 채로. 한쪽 손은 환풍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인숙은 남편을 지나쳐 냉장고에서 1.2L짜리 생수를 꺼냈다. 벌컥벌컥 마시는 그녀의 입가에는 붉은 잔해가 묻어있었다. 인숙은 물을 입에 머금지 않고 목구멍에 그대로 넘겨 버렸다. 페트병을 다 비운 인숙이 숨을 헐떡였다.

“괜찮아? 근데 하우스 딸기여서 비싼데… 겨울은 원래 딸기 철이 아니니까…”

남편이 인숙을 향해 불평했다. 인숙이 숨을 가쁘게 내쉬며 다가왔다. 인숙은 식탁 위 설탕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곧바로 남편을 향해 부었다. 그에게 멋진 선물을 주고 싶었다. 산타할아버지는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고 계신대.

“메리 크리스마스”

설탕이 남편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남편이 하얗게 덮여갔다. 크리스마스의 축복과 탄생, 눈사람처럼 서 있는 남자. 그는 인숙을 향해 높게 손을 들었다. 인숙은 몸이 눅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다리 사이로 끈적한 액체가 떨어졌다, 아랫배가 아파져 왔다. 양수가 터진 줄로만 알았다. 첫 생리를 경험한 날처럼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물어볼 사람 하나 없었던 그날, 빨강을 처음 마주한 그 겨울같이 울고 싶었다. 몸에서 피가 나오는 경험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빨강은 함께 있었으니까. 인숙의 눈이 감겼다.

남편은 인숙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 출산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채. 거리에선 캐럴이 들렸다. 한 남성이 자선냄비 앞에서 종을 쳤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피를 흘리는 여자와 여자를 업고 달리는 남자에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소리만이 거리에서 울려 퍼졌다.

남편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간호사들이 다가와 침대 위에 인숙을 눕혔다. 그는 하혈하더니 갑자기 쓰려졌다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가방을 고쳐 맸다. 젊은 간호사들이 사라지고 중년 간호사가 다가와 인숙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자 의사로 해줘요. 아무래도…”

간호사가 남편을 쳐다보며 오늘 당직인 의사 성별은 모른다고 답했다. 간호사가 산부인과에 콜을 보내자 멀리서 의사가 달려왔다, 남자였다. 자다 나왔는지 부스스한 머리와 발기한 성기의 실루엣이 남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아니 여자로… 라는 운을 떼자마자 그들은 인숙을 데리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인숙이 눈을 뜨자 그녀는 다리를 벌린 채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아이를 낳는다는 행위는 배설의 행위 같았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배설, 즉 싸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인숙은 화장실 문이 갑자기 열렸을 때처럼, 자신의 원초적 행위를 누군가 훔쳐본다고 생각했다. 라텍스 장갑의 촉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양수와 피가 울컥거리는 다리 사이, 하얀 손가락만이 인숙을 더듬고 있었다. 차갑게 데었다는 말처럼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연결된 탯줄을 자르는 순간 속이 허해졌다. 배가 고프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어제 버린 딸기가 먹고 싶었다. 딸기 맛 립밤을 발라도 좋았다. 새콤달콤한 딸기만이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 줄 것만 같았다.

빨간 무언가를 입에 넣어야만 했다. 그것만이 그녀를 구원해줄 거 같았다. 게걸스럽게 생딸기를 양손에 들고 과즙을 질질 흘리면서 먹고 싶었다. 다리 사이에 흘러나오는 태반이나 양수 따위의 것들도 먹어 치워버리고 싶었다. 흐린 세상이 더 이상 흐리지 않을, 색을 가질 방법이었기에.

인숙은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졌다. 아이가 나오는 찰나의 그 순간, 아기집이라는 자궁에서 쫓겨나는 그 순간, 집을 잃은 아이가 서러워서 응애-하고 울어야 하는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삐이이- 하는 이명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채색의 세상이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수술실에는 하나의 덩어리인 채로 세상 밖에 나온 태아, 아니 덩어리만이 은색 판 위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벅지 지방 제거 수술을 했을 때처럼 아이는 셀룰라이트가 하나로 뭉친 거 같았다. 너도 차갑게 데고 있는 중이구나. 웅크린 아이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으니 아이가 색맹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살덩이는 붉은색이었지만 아이가 검은색 막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빨강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빨강은 두려움도 호기심도 아닌 행복이었다.

‘너는 결국 빨강에서 태어났구나.’

히터 바람이 강했다. 건조하면 피부가 상할 텐데. 인숙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팠지만 가벼운 느낌이었다. 남편이 보호자용 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몽롱한 느낌이 지속됐다. 꿈인 것 같기도 했다. 가습기에서 김이 나왔다. 연기가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조화정과 간호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정이 대수를 깨우며 커다란 은색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화정은 컵에 뭔가를 따랐다.

“딱딱한 침대에서 자느라 얼매나 힘들었을고, 사골 끓인 것 좀 가져왔응께 얼릉 쭉 한 잔 들이켜 봐.”

남편은 벌컥벌컥 사골을 마시고 있었고,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뽀얀- 약간은 진득한 사골이 꿀꺽이라는 효과음과 함께 울렸고, 그의 툭 튀어나온 목젖이 도드라져 보였다. 붉은 핏물이 빠지고 결국 하얗게 되는 과정 그리고 뼈를 쪽쪽 빨아먹고 있는 남편이 떠올랐다. 벌컥 꿀꺽 쪽쪽 하는 아우성이 말소리와 함께 섞여 들려오는 것 같았다. 곧 다인실로 옮겨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과 1인실은 비싸다는 화정의 귓속말도.

 

가습기의 증기는 자꾸만 인숙의 시야를 가렸다. 뿌옇게, 하얗게 그녀의 세상이 흐려졌다. 고개를 돌리자 창문 너머로 눈발이 거세게 내렸다. 안개 너머 목소리가 거슬렸다. 몸보신의 이유로 소의 뼈를 빨아먹는 사람들. 인숙은 자기 링거 줄을 뽑아버렸다. 그녀의 손목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침대 시트 위에 번지는 얼룩. 순백의 시트가 검게 변하고 있었다. 인숙 역시 검게, 아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인숙은 양팔로 배를 감쌌다. 앙상한 갈비뼈가 느껴졌다. 나는 나의 뼈를 삼키고 다시 태어났구나, 아 나는 살아 있구나.

인숙은 일어나 탁자 위의 가습기를 들어 올렸다. 닫힌 창문을 향해 힘껏 던져버렸다. 더 이상 흐린 것은 싫었기에. 아래쪽에 있는 작은 창문이 깨졌다. 인숙이 일어나 떨어진 유리 조각을 집었다. 무언가 베어버리고 싶었다. 조잘거리는 입술이나 자신의 손목 따위의 것들을. 자신을 쳐다보는 화정과 간호사 그리고 대수. 그는 문밖으로 나가는 인숙을 따라갔다.

하늘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흡연 구역에선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구름처럼 떠올랐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들이 내렸다. 오랜만에 보는 색깔이었다. 인숙은 주머니에 넣어둔 유리 조각을 손에 쥐었다. 그녀의 발등 위로 피가 떨어졌다. 누군가 흘린 눈물처럼 뚝뚝, 뚝뚝, 붉은 것들은 인숙을 대신해선 울어주곤 했으니까. 맨발 위로 눈이 쌓였다. 눈 위에는 또다시 피가 떨어졌다. 차가웠다, 따뜻했다, 조용했다. 눈은 비와 달리 쌓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수가 그녀를 향해 뛰어왔다. 모든 게 당신 때문이야,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인숙은 유리 조각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손을 폈다. 대수는 빨갛게 물드는 그녀의 손바닥을 보고 있었다. 아니야, 빨간색 때문이야. 대수가 그녀를 보며 울었다. 인숙인지 대수인지 모를, 울음 섞인 말이 들렸다. 빨갛게 번지는 당신의 눈 속으로 눈송이 하나가 사라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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