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동안 한국은 하루 평균 약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했다. 자살하는 이유에는 개인적인 요인과 사회적인 요인이 있지만 필자는 전자의 측면, ‘철학적 자살’에서 이런 문제를 다뤄보고 신의 존재에 대한 소망을 담고 싶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사유하는 존재다. 즉,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미래를 그림과 동시에 어떤 삶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성은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우리의 존재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결코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삶에 대한 이유와 정당성을 찾지 못한 채 모든 것들을 허무주의적 세계관으로 바라보게 되고, 이를 탈출하는 방법으로 철학적 자살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결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필자는 이런 문제를 유신론자의 관점에서 다루면서 무신론자로서도 충분히 인 간의 삶이 유의미함을 증명하려 한다. 먼저 신의 존재를 강력히 바라고 믿는 자로 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태초에 인간 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됐다면 우리의 삶은 그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 것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일 것이다. 즉, 초자연적인 신이 인간에게 삶의 목적과 소명을 부여하는 것은 그나마 우리의 삶을 덜 초라하고 덜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특별하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그러나 꼭 유신론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아도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도 인간은 감히 우주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철학자 최성호 교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 초월적 의식을 통해 자아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존재, 그렇게 자기 삶이 궁극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정당화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존재는 이 우주에서 오직 인간뿐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결론적으로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을 비극적으로 인식한 채 세상을 등질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을 신을 통해 위대한 존재로 승격시킬 것인지 혹은 삶이 가지는 모순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며 살아갈 것인지 말이다. 그래도 필자는 우리가 전자보다 후자 속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박세연 | 행정·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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