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최초로 열린 제42주년 5·18 기념 학술제를 가다]

지난 5월 20일 박물관 강당에서 5·18 민중항쟁 기념 학술제가 열렸다. 매년 우리 학교에서 5·18 민중항쟁을 주제로 각종 행사가 열리지만, 학술제는 처음이다. 김완술 전북행사위원회장은 “비교적 덜 알려진 전북의 5·18민중항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선 전문가들의 학술적인 분석이 꼭 필요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그 당시 5·18 전북 민중항쟁 현장의 이야기를 전북대신문이 이번 학술제를 통해 알아봤다. <여는 말>

▲도내 처음으로 ‘전북 5·18 학술의 장’ 열리다
학술제는 제42주년 5·18민중항쟁기념 전북행사위원회와 사회과학연구소의 공동 주관으로 기획됐다. 모든 참석자가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으며 김완술 회장의 개회사가 이어졌다. 그는 “5·18 민중항쟁이 광주에서만 발생한 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이런 오해를 풀어나가기 위해 이세종 열사가 사망한 우리 학교에서 학술제를 마련했다. 윤찬영 전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사회를 맡은 가운데 식순에 따라 1부 주제발표가 먼저 진행되고 2부에는 지정토론이 이어졌다. 주제발표는 박대길 문화융복합아카이빙연구소 전임연구원과 김정원(사회대·사회) 교수가 맡았다. 박 연구원은 5·18민중항쟁 연구자료의 기초조사연구 및 편찬활동, 김 교수는 5·18 민중항쟁 지평 확대를 위한 전북지역 기억투쟁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했다.

▲5·18 민중항쟁 관련 연구자료, 오탈자 및 사실 검토 부족
박대길 연구원은 민중항쟁에 관한 학술 연구와 논문의 빈약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지난 2012년 전북 민중항쟁을 집대성한 결과물인 『전북민주화운동사』를 그 예시로 들었다. 위 책은 민중항쟁의 성격과 의의를 ‘동학농민혁명의 전통에서 이어받았다’, ‘운동의 지속성’, ‘균형 잡힌 운동’, ‘발군의 지도자들과 고귀한 희생자들이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총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박 연구원은 이 중 ‘균형 잡힌 운동’,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문장이 추상적이기에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학술제와 같은 행사를 통해 앞으로 다듬어 가야 할 부분”이라고 전했다. 또한, 인터뷰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오류가 많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해결 방안으로 “역사적 사료를 제대로 검토해 확실한 기초조사연구 및 편찬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북 5·18 민중항쟁의 기념사업 법제화에 대한 찬반 논쟁을 설명했다. 이를 기념사업으로 법제화했을 때 5·18 민중항쟁이 국가적으로 공인받게 돼 보상 및 보훈이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직접 연구에 관여하면서 이와 관련한 이들의 의견이 반영되기 어렵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박 연구원은 “국가가 5·18을 공인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지만 5·18의 산 증인인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더는 ‘주인’이 아닌 ‘손님’의 입장이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정부의 각 부처에서 제정하는 법률 외에도 지방자치단체가 정하는 조례가 있다. 하지만 전북에서 유일하게 조례를 정한 정읍시, 남원시는 시행규칙을 지정하지 않았을뿐더러 실질적인 활동도 부족하다. 박 연구원은 “법제화 시행에서 그치지 않고 시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활동을 지속 해야만 5·18 민중항쟁 정신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다”고 전했다.

▲5·18 민중항쟁 지평 확대를 위한 전북의 기억투쟁 
김정원 교수는 지난 1980년 5월 18일 자정에 발생한 계엄군의 교내 난입 사건과 당시 희생된 이세종 열사를 기억하고자 전북지역의 5.18 민중항쟁을 분석했다. 앞서 그는 이런 전북지역의 민중항쟁을 ‘이세종 기억투쟁’이라 명명했다.

그는 기억투쟁의 전개 과정을 시기에 따라 총 3단계로 분류했다. 1단계는 지난 1985년에서 1989년까지의 과정이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 건립이다. 당시 국가의 관련 제재가 심해 건립 과정은 비밀결사로 이뤄졌다. 추모비가 완성된 후 공식적 의례가 최초로 시행되기도 했지만, 방학 중 경찰이 철거하는 바람에 추모비는 김제에 있는 이세종 묘소 옆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세종 열사를 계속해서 추모했다. 또한 집회가 있으면 학생들은 이세종 광장에서 요구사항을 촉구했다. ‘이세종’이라는 인물이 우리 학교 시위 및 투쟁에 상징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2단계로 지난 1990년에서 1999년까지의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이세종 열사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초점을 뒀다. 광주민주화운동관련 보상심의원회에서 여러 번의 보상 신청이 기각되던 중 지난 1994년 부검의의 의견서로 이세종 열사의 타살가능성이 제기됐다. 김 교수는 “이를 통해 그가 국가에 의해 살해됐다는 이견의 전문적 근거를 확보했다”며 “현재까지도 핵심 근거 자료로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3단계는 지난 2000년에서 현재까지의 이야기다. 이세종 열사가 5·18 민중항쟁 최초 사망자로서 본격적 공론화가 진행된 시점이다. 이때 추모 의례 및 공간도 확대됐다. 이 열사가 5·18 민중항쟁 최초 희생자라는 사실도 각종 매체를 통해 점차 확산됐다. 지난 2002년 그의 모교인 전라고등학교에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지고 그의 이름을 딴 장학금 수여도 진행됐다. 이밖에도 김제시민운동장 광장, 우리 학교 제1학생회관, 전주 가두시위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오거리 광장 등 그를 추모하는 공간이 점차 증가했다. 이로써 이세종 열사는 5·18 민중항쟁에 대한 전북지역의 공적 상징으로 정착하게 됐다.

▲어려웠던 첫 학술제 개최, 연례행사로 자리 잡기를
앞서 박 연구원이 말했듯이 이들은 전북권의 5·18 민중항쟁을 주제로 한 학술제가 일회성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구자료의 검토나 여러 논쟁에 대한 일반화된 현안을 내놓기 위해선 여러 학자와 시민들의 의견이 서로 공유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북권에서 이 같은 학술제가 진행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전북행사위원회 측에 의하면 행사를 기획할 때 발표를 맡을 지역 내 학자들이 부족해 섭외가 힘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학술제를 기획한 제42주년 5·18민중항쟁기념 전북행사위원회는 상설 기구가 아닌 일시적으로 구성된 단체다. 따라서 5·18 민중항쟁 학술제가 계속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조직 유지가 이뤄져야 한다. 김완술 전북행사위원회장은 “이번 학술제를 계기로 앞으로 2, 3회 더 기획해나가야 한다”며 “충분한 준비를 위해 6월부터 행사를 구상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학술제에 참여한 윤영일(전주시·25세) 씨는 5·18 민중항쟁이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라는 점과 전북 지역 내 관련 연구가 부족하다는 실정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과 시민사회에 관한 관심이 역사적 오류를 바로잡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근엽 기자 30dlf@jbnu.ac.kr
이우현 기자 qazsad1234@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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