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셔의 이중생활 왕보경 | 국문·17

 

우리 동네에서는 이게 불법이라던데
파업은 합법이어도
투잡은 반칙이지

수줍음은 사치요
남은 건 몸뿐

한적함을 빌리고 싶은 그녀는 꿈과 희망 을 심어준다는 영화를 아이들에게 틀어주 었다. 파란 얼굴이 나와서 그을린 남자에 게 소원을 물었다. 제 소원은요… 빨래를 개던 그녀가 귀를 열었다. 쫑긋. 열린 귀는 다시 접혔다. 털썩. 몸부림치는 아이들 덕 분이었다. 엎어진 컵에서 오렌지 주스가 흘 렀다. 개켜지지 않은 빨래는 주황색 얼 룩을 얻었다. 권태기 온 남자의 표정을 한 채 그녀는 바닥을 훔쳤다. 요술 램프가 있 다면 빌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잡힌 건 경력 없는 이력서와 자그마한 아이의 손뿐이었고

쓸 수 없는 나의 경력은 어때. 숨 참고 울 음 참기, 상처에 약 바르지 않기, 아끼는 원피스가 찢어져도 화내지 않기. 사실은 화낼 힘이 없는 거지만

가장 싼
가장 변두리의
가장 시커먼

피맛이 흥건하게 흘러넘치는 것들을
모조리 마셔서 없애버리고 싶은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내팽개칠 수 없는 짐을 진 낙타도 그녀 보다 가벼울지 모른다. 눈치도 없이 메아리 가 자꾸만 울려 퍼졌다. 아이의 울음이 목 을 졸라왔고 깨어나고 싶었다. 꿈이라 믿 고 싶었던 것들이 다시금 휘몰아쳤다

삐-와 삐빅- 소리가 겹쳐지며
페이드 아웃

그녀가 잘하는 건 삑-- 바코드를 찍는 일 말고도 많거든요. 사실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답니다. 경제학 학위는 물론이구 요. 그녀는 파이가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 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인생이 파이(π) 처럼 끝나지 않을까 봐 두려움에 젖었어 요. 라테 아트를 할 줄 알기도 했고요. 손톱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게 매니큐어를 바를 수 있기도 했어요. 누구보다 즐겁게 웃을 수 도 있는 사람이었답니다

이중생활이 금지된 이유는
평범한 사람은 견딜 수 없어서예요
결정적으로 해롭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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