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한승헌 변호사 추모 노제 25일 열려
사회공동체에 대한 헌신 강조한 시대의 큰 어른

지난 25일 우리 학교를 졸업한 故 한승헌(정치·57졸) 변호사의 노제가 대학본부 앞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치러졌다.

법조인으로서 절대권력과 싸우며 시대의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줬던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20일 영면했다. 그를 추모하는 현수막이 학교 곳곳에 게재됐으며 지난 25일 진행된 노제에는 교내 구성원 및 각계각층이 참여해 한승헌 변호사를 기렸다. 그는 우리 학교 정치학과 최초 입학생이자 전북대신문 창간 기자로 언론인을 꿈꿨다. 그러나 한승헌 변호사는 당시 사명을 지키지 않는 언론인의 행태를 보고 다른 진로를 찾게 됐다. 졸업을 앞둔 50년대 중후반은 6.25 휴전 직후로 취업난이 심각하던 시절이었다. 지난 2018년 본지와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한승헌 변호사는 ”고등고시 합격하면 취직 걱정은 면한다“는 조언을 듣고 고시에 도전해 검사가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무부와 서울지검에서 5년간 검사직을 수행하다 검사보다는 변호사가 자신의 적성에 적합하다 생각해 변호사로 직종을 변경했다. 이후 그는 변호사들이 맡기 꺼리는 시국 사건을 100건 넘게 변호했다. 지난 인터뷰에서 한 변호사는 자신이 맡았던 변호 중 1974년에 진행된 민청학련 사건이 특히 잊히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이들을 처벌한 사건으로 당시 독재 정권에 반하는 이들은 구속되거나 사형에 처했다. 이들을 변호한 한 변호사 또한 반공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하룻밤 갇혔다.

이외에도 그는 ‘동백림 사건’, ‘인민 혁명당 사건’ 등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시국사건을 꾸준히 변호했다. 지난 2018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승헌 변호사는 “탄압을 받을수록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법치주의를 살려내는 데 일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밝혔다. 변호사 시절 그는 재판장에서도 조용히 앉아 있지 않고 적극 피고인을 도왔다.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며 그 과정에서 정권에 끌려가 온갖 고문에 시달리고 두 번에 걸쳐 총 22개월간 징역도 살았다. 당시 인터뷰에서 한승헌 변호사는 “법조인이 되면 흔히들 성공하고 출세했다는 말을 듣는데, 거기에 안일하게 멈춰서는 안 된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이후 한승헌 변호사는 지난 1998년 제17대 감사원장을 맡으며 사법제도 개혁에 앞장섰다.

한승헌 변호사를 인터뷰했던 전북대신문 57기 서도경(생태조경디자인·22졸) 씨는 문회루 공사가 시작될 즈음 선생님을 처음 느티나무 카페에서 뵀다. 그는 “전쟁 직후 학교에 다니셨던 선배님께서 당시와 크게 변한 학교 모습에 놀라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며 “인터뷰 내내 사회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한편, 한승헌 변호사의 흔적은 우리 학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여러 차례 중앙도서관에 책을 기증하거나 개교 70주년 행사에 참여하며 모교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김근엽 기자 30dlf@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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