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1953

이 작품은 뒤틀리고 뭉개진 얼굴과 기괴한 형태의 초상들로 유명한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의 가장 유명한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연작 중 하나다. 베이컨은 1949년부터 1971년까지 바로크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1965)를 재해석한 다프레(d'après, 프랑스어로 기존 예술작품의 리메이크)를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벨라스케스와 베이컨의 이 두 작품은 비슷한 구성과 포즈, 주제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 베이컨은 벨라스케스의 원작이 있는 로마에 갔을 때조차 일부러 이 작품을 보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작품을 차용한 자신만의 새로운 인노첸시오 10세 초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베이컨의 작품에서 교황은 직선으로 떨어지는 선들 때문에 끝없이 추락하는 감옥에 갇힌 듯하다. 또 이 선들은 교황의 형체를 해체적인 울림으로 길게 찢어 놓는다. 여기에 아래로 무한히 떨어지는 선들은 교황이 입은 보라색 옷과 튀어나온 듯 입체적인 노란색 수평선과 만나 그 긴장감과 강렬함을 더하고 있다. 즉 이 노란색 선들은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주교좌를 사형집행의 전기의자처럼 변형시켰고, 의자에 꽁꽁 묶여 무시무시한 최후의 심판을 받은 교황은 온몸으로 찢어지게 입을 크게 벌려 처절하게 절규한다. 베이컨의 이 작품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어두운 감정인 긴장감, 공포, 혼란 등이 모두 표현되고 있다.

17세기 교황은 권위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이자 무엇보다도 거대한 두려운 존재였다. 베이컨은 이러한 표상적 이미지를 통해 자기 자신의 불안한 내면과 세계의 복잡한 심리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어린 시절의 어두운 경험과 동성 연인과의 관계를 통해 각인된 고통을 담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베이컨은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허약했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물론 특별한 미술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보수적이며 군대식 명령조로서 엄격했던 아버지와 심한 갈등 속에 괴로워했고, 결국 가족을 떠나 런던, 베를린, 파리 등지를 떠돌며 이방인으로서 어렵게 살았다. 그는 스무 살 무렵까지 정착하지 못하고 술과 성, 예술과 인테리어 디자이너 생활을 이어 나갔다. 당시 베이컨은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 등과 어울리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술과 성적인 방탕한 생활, 그리고 지병인 천식으로 인해 화가로 전향한 처음 10여 년 동안의 작품은 습작을 포함한 몇 점의 작품만을 남겼다.

그러나 곧이어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은 베이컨의 작품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가 경험한 전쟁의 공포감과 참상은 붉은 바탕에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목, 벌린 입, 뒤틀리고 절단된 모습의 몸 덩어리로 그려진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1944)을 발표하며 베이컨을 진정한 예술가로서 이후 그만의 독특한 절대적인 인간 존재의 탐구 작가로 성장하게 했다. 덧붙여 베이컨의 인간 실존적 작품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고자 한다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저서『감각의 논리』(1981)를 함께 읽어보자.

김미선 | 예대 강의전담교수·서양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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