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록·써클 억압…시위로 표출
탱크 진압으로 이세종 열사 희생

‘신새벽 뒷골목에/ 네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1980년대 우리학교 시위의 선두에 섰던 이광철(철학·85년졸) 동문은 그 당시를 1982년에 발표된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란 작품이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말한다.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 ‘민주주의’를 남몰래 쓸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투쟁의 선봉에 섰던 이광철(철학·85년 졸) 동문을 만나 뒤돌아 봤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들끓어 오르던 1970, 1980년대는 시위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고, 이는 우리학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교수들의 강의록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심사를 받아야했고 지성의 터전인 대학은 경찰들이 상주하며 교련을 강요받고 있었다. 이 동문은 “당시는 온갖 통제적 장치가 가득했던 때였다”며 “시위냐 침묵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들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학생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써클’ 결성도 쉽지 않았다. 이념과 가치를 말하던 써클들은 지도 교수가 없어 해체되기 십상이었고, 지도교수 없이 결성된 써클은 불법 써클로 간주되곤 했다. 때문에 지하 써클이 생겼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학문적 욕구를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하 써클이 발각되면 징역을 살아야 했고, 심지어는 2명 이상이 모이면 무조건 불법 단체로 규정되는 억압의 시대였다.


‘12.12사태’ 이후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자유 인권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는 잠재울 수 없었다. ‘긴급조치’로 사라진 총학생회는 부활했고 학생들은 거리에 또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또 우리학교를 중심으로 우리 지역 대학생들은 연일 전주역 광장에 모여 1시간씩 연설과 토론을 했다.


그러던 중 1980년 당시 전북 남 대학 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 연락 책임자였던 이세종 열사가 우리학교 제 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이다 공수 부대에 쫓겨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일 새벽 1시에 땅바닥에서 온 몸이 멍들고 피투성이인 채 주검으로 발견됐지만, 사인은 단순 추락사로 발표되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동문은 “그 때 지도부는 수배중이서 모두 피해 있었고 공수부대가 학교에 탱크를 밀고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그처럼 거센 탄압을 상상조차 못했기에 사전에 안타까운 희생을 막지 못한 점이 아직도 뼈아프다"고 전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독재와 억압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젊음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은 이세종 열사가 있었고,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끝까지 민주주의를 외쳤던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동문은 “선배들이 목숨을 바쳐 쟁취한 민주주의”라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사회적 부조리를 외면하거나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저작권자 © 전북대학교 신문방송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