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아이템 없을까?’.
내가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한 주 신문을 마감하는 금요일부터 꿀맛 같은 주말을 지나 편집회의를 하는 월요일까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나는 학교를 어슬렁거리며 오늘도 아이템을 찾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퇴임 선배와의 대화 중 아이템에 대한 고민을 한 방에 날려버릴 해답을 찾게 됐다. ‘모든 일에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것. 이어 ‘내가 궁금한 것이 곧 독자들이 궁금하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덧붙였다.
일찍이 의심에 대해 논한 사람으로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가 있다. 그는 17C에 ‘방법적 회의’를 생각해냈으며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근본원리를 세웠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21C. 100이면 100, 다른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의심은 첫걸음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난 왜 애인이 없지?’라고 생각한 어느 건지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사람은 자신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무뚝뚝한 성격과 외모에 무신경함이라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렇다면 그는 먼저 무엇을 할까. 내 생각엔 아마도 웃는 연습을 하고 자신을 가꾸기 시작할 것 같다. 이처럼 의심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왜’라고 묻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더 나은 사회로의 변혁도 일찍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한 달 전 고려대 경영학과 김예슬 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로 시작하는 자퇴선언문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온라인에는 그녀를 지지하는 카페가 개설됐으며 오프라인으로는 대학생들이 뒤이어 대자보를 붙이더니 김 씨를 응원하는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기성세대는 윗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를 자문하며 또랑또랑한 20대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명문대 최고학과라는 타이틀을 가진 김 씨의 자퇴선언은 그렇게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사회에 돌을 던졌다.
그러나 이 같은 행동에 우려를 표하는 같은 20대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한다’라는 비난과 ‘그래도 고대니까 주목을 받는구나’라는 질시가 대표적이었다. 물론 김 씨가 던졌던 돌멩이가 그간 굳건히 쌓아온 탑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돌멩이가 모여서 바위가 된다면 더 큰 균열을 만들고 나아가 벽돌 부스러기라도 남기지 않을까.
김 씨의 대자보와 후폭풍을 보면서 신영복 씨의 ‘어리석은 사람이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갑니다’라는 수필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도 어리석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1년만 더 있었으면 명문대 경영학과 졸업장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 곳에 입성하기까지 흘렸던 땀방울들은 또 어떤가.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깝게 보자면 내가 쓰는 이 글쪼가리가 당신의 마음을 울려 당장 당신과 학교, 나아가 사회에 ‘왜’라는 물음을 갖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비효과’를 믿는다. 언젠가는 이 작은 글쪼가리가, 예슬 씨의 외침이 세상을 바꾸는데 일조할 것이라고 말이다.
양수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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