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잘 살게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반드시 잘 살아야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 가운데에는 부유한 유럽의 국가들도 들어 있지만, 중남미나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들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난한 국민들이 부유한 국민들보다 더 큰 행복감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이유는 사람들을 서로 돕고 어려움으로부터 지켜주는 사회적 망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이나, 종교기관, 공동체 혹은 국가기관이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의 이인 편에서 “마을의 인심이 인후 한 것이 아름다우니, 가려서 인후한 마을에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里仁이 爲美하니 擇不處仁이면 焉得智리오. 성백효 역)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인후한 마을은 곧, 사랑이 두터운, 다시 말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마을일 것이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얼마일까? 외국에 다녀본 사람들 중에는 한국처럼 살기 좋은 나라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외국에서 볼 때 한국의 물질문명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적 삶 속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우리의 삶에 만족하는가? 우리의 미래가 밝아올 것으로 기대하는가?
1997년 터진 구제금융 사태 이후로 우리 사회는 크게 변하였다. 그 이후 무자비한 경제논리와 광포한 시장만능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무한 경쟁체제의 부속물로 전락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경제 현상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교육, 복지, 기회, 지역발전 등 여러 장면으로 파급되면서 우리를 옥죄고 있다. 눈앞의 취업난과 경제난도 문제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이제 사람들은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 있지만, 이들은 어울려 살 사람들이 아니고, 싸워 이기고 자신을 이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사람들이 되고 있다. 
공자가 말한 인후한 마을은 어디에 있을까? 이 시대에 ‘가려서 살 만한 인후한 마을’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인후한 마을은 어디로 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버린 것일지 모른다. 목전의 이익에 현혹되어 남을 돌아보지 않게 되었을 때, 이 순간의 승리를 위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멈추었을 때, 현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외면하였을 때, 바로 그때 인후함은 우리를 떠났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10여 년 간 우리에게 벌어진 변화를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역전은 다른 곳에서가 아닌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를 보면, 초등학생인 트레버가 한 사람이 세 가지의 선행을 베풀고 선행을 입은 사람이 다시 세 가지의 선행을 베풀기를 거듭한다면 어떤 세상이 될지를 꿈꾸는 장면이 나온다. 과연 어떻게 될까? 
박창호┃사회대·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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