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으로 맞는 가을-3색 추억 열전]





사람은 추억으로 인생을 살아간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지만 똑같은 추억을 가질 수는 없는 법. 저마다의 추억은 그래서 더 아련하고 애틋한 게 아닐까. 건지벌도 6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셀 수 없는 많은 이들의 추억들이 쌓여왔을 것이다. 마음 한켠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캠퍼스 곳곳에 내려앉은 가을 단풍처럼 건지인들의 가슴에 각기 다른 색깔로 드리워진 특별한 추억들을 만나보자. 이 가을, 추억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강도경(경제·08) 씨
“1년 전 주막엔 새내기가 있었죠”

강도경(경제·08) 씨는 제법 쌀쌀해진 날씨 덕분에 지난해 이맘때쯤 소운동장에서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녀는 지난해 학술문화체육회한마당에서 이틀 동안 친구들과 합심해 주막을 열었다.
그녀가 열었던 주막은 경제학과 새내기 10명이 모여 ‘우리들만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구상했던 것. 서로 7만원씩 용돈을 턴 도경 씨와 친구들은 오후 6시부터 새벽 5시까지 소운동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한번은 서툰 요리솜씨 탓에 두부를 자르다 피가 났는데, 그걸 김치 국물로 착각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주막을 여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은 추억은 친구들과 몰래카메라를 했던 것. 평소 의욕이 충만했지만 무슨 일이든 미숙한 새내기였던 그녀가 약속시간에 늦자 친구들은 하나같이 ‘너 때문에 일을 못 하겠다’며 버럭 화를 냈다.
“너무들 화를 내서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친구들이 웃는 걸 보고 몰래카메라인 걸 눈치챘어요. 그 후로도 친구들은 하루 종일 티 나는 몰래카메라를 하며 서로 깔깔대며 웃곤 했죠.”
도경 씨는 주막을 운영했던 이틀 동안 이익은 없었지만 대신 졸업한 뒤에도 대학교 1학년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을 선물 받은 것으로 만족한단다. 이 가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과 추억을 가진 그녀의 가슴은 누구보다 따뜻할 것이다.

정보전산원 이팔규 씨
“박물관에서 노숙하던 시절 그리워”

70년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근 40년의 세월을 학교와 함께 한 정보전산원 이팔규 전산운영부장은 1학생회관 옆 박물관과 미술관을 가면 설레는 가슴을 감출 수 없다. 이 씨가 우리학교를 다니던 당시, 중앙도서관을 비롯한 모든 주요 건물들이 그대로 있어 학창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술관 앞에 있는 잔디밭을 축구장 삼아 뛰놀던 기억, 지금은 없어졌지만 허리까지 물이 올 정도로 수심이 깊었던 연못과 평화의 숲을 거닐며 데이트를 하던 그 때가 어제 같다고 말하는 이 씨. 그는 특히 당시 중앙도서관이었던 박물관에서의 기억이 가장 애틋하다고. “2층에 있는 학습실은 밖과 바로 연결된 계단이 있었는데, 통제가 불가능해 그냥 24시간 열려있었던 기억이 나요. 집이 전주였는데도 공부하기 위해 며칠을 학습실에서 지내며 노숙 아닌 노숙을 하던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죠.”
학습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잠을 청하길 며칠. 마침내 일이 터졌다.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 찾은 병원에서 폐결핵 판정을 받은 것이다. 병이 완치된 지금 이 씨는 “당시 어리석을 정도로 무모하기만 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객기라고 치부했지만, 그야말로 쌍코피를 터트려 가면서 공부에 열심이었던 젊은 청춘의 열정이 느껴진다. 그렇게 그의 무모하고도 불타는 청춘은 지나갔지만, 그때의 추억은 가슴 속에 애잔하게 남아 있다. 건지벌이 직장이 된 지금, 캠퍼스 곳곳에 배어 있는 아련한 추억들을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다는 것, 행운이라면 행운이 아닐까.

김창희(사회대·정치외교) 교수
“산책로 종점에 있는 그 시절 아지트”

법학전문대학원 2호관 앞. 그곳의 인도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나무 한 그루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나무 앞에 서있는 주인공은 바로 김창희(사회대·정치외교) 교수. 다른 나무와 별다른 특이점도 없는 이 나무, 김 교수는 어떤 인연을 맺은 것일까.
김 교수는 우리학교 정치외교학과 출신이지만 사회대보다 법대 건물과 인연이 더 깊다. 그가 우리학교를 다니던 74년도에는 정치외교학과가 일명 법정대라고 불렸던 법대 건물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ㄷ’형태의 법대는 김 교수가 학교를 다니던 때만하더라도 ‘ㅣ’형태였고, 바로 옆에 있는 상대 건물들은 언덕이 큰 과수원 밭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김 교수. “나무들이 크기가 작아서 그늘도 시원하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에 갈 곳은 없고 마땅히 모일 장소가 없었으니까, 거기가 우리에게는 작은 아지트가 됐었죠.”
최근에 이르러서는 조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나무가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나무가 별로 없었단다. 그래서였을까, 학교를 지나던 엿장수들도 그 나무 앞에서 판을 벌이곤 했었다.
“쉬는 시간에 엿을 못산 친구들이 교수님 몰래 창 밖 나무에 쪽지를 날리거나 엿장수에게 말을 걸고 그랬거든요.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몇 년 전에 이 나무가 아직도 있다는 걸 알고는 너무나 반가웠죠. 옛 시절 향수도 떠올릴 겸 학교를 산책할 때마다 늘 살펴보는 버릇도 생겼어요.”
젊은 시절, 팔 하나 보다도 작았던 나무는 이제 어느새 두 팔로 안아야 할 만큼 세월이 지났다. 그렇게 나무는 크고 시간은 지났지만, 추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김 교수를 반기고 있다.
김선희·고동우 기자
ksh107@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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