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와 개혁으로 보답한 전북과 김대중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서거하자 '나의 반쪽을 잃었다'고 오열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많은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여야와 지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그의 서거를 안타까워했고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음을 아쉬워했다.

그가 있을 때 고마움과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는데 그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지 몰랐다는 뒤늦은 평가가 줄을 이었다.

특히 그에게 절대적 지지를 보냈던 전북도민을 포함한 호남인의 슬픔과 아쉬움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마치 어버이를 잃은 듯, 형제를 잃은 듯 망연자실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거의 30년 동안 전북도민과 정치적, 인간적 희로애락을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71년 40대 기수론을 들고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같이 기뻐했고, 낙선 때는 같이 슬퍼했다. 그 이후 감옥에 가고, 집안에 연금이 되고, 교통사고를 위장한 테러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어 죽임을 당할 뻔 했을 때, 군사독재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고 미국에 망명했을 때는 같이 분노하고 애달아했다. 모진 고통을 겪은 후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는 내 일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그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 했던 우리 도민들은 대통령 당선 이후 기대가 컸지만 열매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였다. 속을 아는 사람이 부담을 줘서는 안 되고 오히려 지켜줘야 한다는 심지 깊은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전북도민들은 지난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 씨를 상대로 맞붙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61.5%의 지지를 보냈다.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지지율 이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87년 대선에선 83.4%, 92년엔 89%, 97년엔 무려 92.5%라는 경이적인 지지를 보냈던 도민들로서는 요구할 게 많았겠지만 도민들이 무었을 바라서가 아니라 민주화와 개혁을 위해 잘 해달라는 기대 속에서 내 밥상에 떡 하나 더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호사가들은 김 전 대통령이 우리의 지지로 집권했으니 지역발전과 우리지역 인재 발탁, 그리고 낙후와 소외를 한꺼번에 벗어나려는 듯 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광주 전남에 비해 프로젝트와 예산이 적다고 불만이었고, 새만금 방조제 공사를 중단했다고, 김제공항이 진행 되지 못한 것은 역차별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동계올림픽 국내후보지를 무주가 아닌 평창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도 서운함을 표시했다. 그래서 한때는 전북 홀로서기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도민의 뜻과 호사가들의 뜻이 조금은 달랐던 것 같다. 사실 김대중 정부에서 전라북도는 예산 2조원 시대를 열었고,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던 국정원장, 경찰청장 등 권력기관장이 전북출신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등장했으며, 청와대든 어디든 전화 한통화로 연결되기도 했다.

현재 전라북도에서 예산문제를 상의하려 해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수뇌부에 없다는 하소연을 들을 때면 과거가 그리워질 정도이다.

사실 우리 도민들은 전북에 무엇을 해 주었는가 보다는 국정방향과 국가운영이 공정했는지, 개혁적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비중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만들어 인권후진국가의 오명을 벗게 했고, 여성부를 신설하여 여권신장에 기여했고, 국가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두어 난개발을 막고 나라를 세련되게 발전시키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냈다. 또 남북관계와 외교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이고, 국가경영에 있어 중산층과 서민에게 방점을 찍고 운영했으며 그 결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을 자랑스러워 한 것이다.

우리 도민들은 맹목적으로 지지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정책과 노선이 훌륭했고 일관성이 있었기에 지지했다. 그는 그 기대에 부응해 불굴의 의지로 역경과 탄압을 이겨내고 최선을 다한 정치를 했기에 도민의 자존심을 지켜준 것이다. 전북도민과 김대중은 개혁정치를 위해 지원하고 지지받는 그런 관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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