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에서 별을 헤던 아름다운 민족시인

대성중 민족교육의 성지…윤동주 배출해

과거와 현재 공존하는 용정, 역사의 산실

 

해방의 기쁨과 환희로 들썩였던 1945년 8월 15일. 그로부터 63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해방의 역사를 목숨으로 일군 선구자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새기고 있을까.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지도 못한 채 초개처럼 목숨을 바친 이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들이 있어 존재할 수 있었다.

1917년에 태어나 광복을 6개월 남겨두고 눈을 감은 윤동주 시인 역시 해방을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민족의 선구자이다. 그의 숨결을 중국 용정에서 만났다.

독립 열사들의 기념관의로 사용되고 있는 대성중학교

북한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중국 용정시는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자 19세기 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이 처음 개척한 땅이다. 나라 잃은 설움에도 불하지 않고, 한인들이 모여 불굴의 의지로 일궈낸 땅, 용정은 바로 일제 치하에서 항일과 독립 운동이 점화된 역사적 공간이다. 여기에 위치한 대성중학교 역시 민족교육의 성지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다.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 등이 대성중학교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현재 대성중학교는 그 규모가 커지면서 용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족 인재들을 길러내는 유서 깊은 학교로 자리잡고 있다. 이 현대적 용정중학교 안에 옛 대성중학교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지금은 조선족들의 역사를 알리고, 독립 열사들을 소개하는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기 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윤동주 시비’로 그의 대표작인 「서시」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는 나라 잃은 젊은 시인의 고뇌와 깊은 성찰의 언어들이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고 있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좁은 복도와 작은 교실이 보인다. 70여 년 전 윤동주 시인이 공부하고 꿈을 키웠을 이곳, 삐그덕 거리는 오래된 복도에도 뭉클한 감회가 일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대성중학교 연혁과 역사, 대성중학교 출신 유명인사를 소개하는 코너가 마련돼 눈길을 끌었다. 특히 잘 정리된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시집, 성적표 등은 대성중학교가 윤동주 시인의 모교로서 그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엿볼 수 있게 했다. 역사 탐방을 온 구인훈(한양대·사학 07) 씨는 “윤동주 시인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막상 연변에서의 그의 활동이나 용정중학교에 대해선 전혀 몰랐던 게 사실"이라며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이 알고,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가슴 벅차다”고 말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내려오니 용정중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윤동주 시인과 독립 열사들이 항일 교육을 받으며 광복을 꿈꿔왔을 그 자리, 반 백년을 훌쩍 넘은 지금도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 역시 그 곳에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용정중학교를 뒤로하고 도착한 목적지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인 두만강이었다. 중국에서 보는 북한은 희미하지만, 드문드문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촌락이 형성돼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작품 활동은 평양에서도 약 7개월 간 이뤄졌다.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남쪽하늘」, 「거리에서」 등의 작품을 집필했으나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학교가 폐교돼 다시 용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 온 용정.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노래했던 젊은 시인이 꿈을 키운 이곳, 돌아오는 내내 용정의 풍경을, 젊은 시인의 숨결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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