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경향신문, ‘“좌파의 온상” 이론학과 폐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슨 일 있나’
한겨레, ‘황지우 “한예종 구조개편 겨냥 표적감사 당했다”’
연합뉴스, ‘한예종 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일보, ‘문화계 진보인사 물갈이 끝’
해럴드경제, ‘황지우 한예종 총장 사표 제출’

아빠가 스스로 한예종을 나온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오늘, 현태 아저씨의 자살 소식이 아빠의 핸드폰을 바쁘게 한다. 아빠는 검은 넥타이를 두르며 ‘자퇴 모임’ 중에서 현태 아저씨가 네 번째라고 했다. 나는 아빠에게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라고 말한다. 아빠는 내일 사료 공장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정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결근을 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현관문을 바쁘게 나서는 아빠의 작은 등을 바라본다. 거실에는 개 사료 냄새처럼 쿰쿰한 공기와 나만 남는다.

새벽 한시. 아빠가 늦는다. 술을 먹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괜히 초조해 잠이 오지 않는 나는 슬쩍, 동생의 방에 들어간다. 피곤한 고 3이 책상에 엎드려 있다. 불편한 잠을 자다가 움찔거리는 넓은 등을 보면서 새삼 세월을 실감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은 반듯하고 공부 잘하는 동생을 특히 좋아했다. 동생의 성적은 언제나 ‘수’다. 인성 평가에 ‘성실하고 예의 바름, 나이답지 않은 의젓함’ 이라고 적힌 동생의 통지표를 보면서 한숨을 쉬는 사람은 아빠 밖에 없었다. 모두가 동생은 나중에 뒤에 ‘사’자가 붙는 인물이 될 거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동생이 어떤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 가족들은 동생과 깊은 대화를 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잔뜩 어질러진 수험생의 책상 위에서 현대사 교과서를 집어 든다. 표지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환하게 웃고 있는 책을 차르륵 넘겨보다가 1996년의 초등학생이 그린 미래 상상화와 마주친다. 그림에는 텔레비전에 손을 쑥 집어넣어 광고 속의 라면 맛 캡슐을 꺼내 끼니를 때우는 미래인들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텔레비전은 단단하고, 라면은 끓는 물에 후레이크와 스프를 넣고 3분 익혀 먹는다. 1994년 도입이래, 매년 과잉 경쟁과 입시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사건으로 도마에 올랐던 수능도 그대로다.
 
새벽 세시. 깜빡, 잠이 든 사이에 아빠가 집에 들어왔나 보다. 동생과 아빠가 다투고 있다. 거실에 아빠가 벗어놓은 옷에서 술 냄새가 난다. 동생이 비틀거리는 아빠를 방밖으로 밀친다. 바닥에 맥없이 팽개쳐진 아빠가 동생의 닫힌 방문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저런 못 배워먹은 새끼.”
“아씨 조용히 좀 하라니까!”
동생이 제 방문을 벌컥 열고 책을 던진다. 거실 바닥에 <2029년 수학능력시험 구술심층면접 실전예상문제집>이 널부러진다. 방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집 안의 공기를 정리한다. 나는 방에 들어와 아빠가 왜 동생의 통지표를 보고 한숨을 쉬는지, 아빠가 왜 동생의 ‘수’를 알면서도 못 배워먹은 놈이라고 욕하는지 생각해본다. 술 냄새처럼 몽롱한 거실의 정적 속에는 널부러진 문제집과 아빠만 남는다.

아침 일곱시. 살짝 열린 화장실 문 틈 사이로 동생이 보인다. 거울을 보고 있는 동생. 면접 연습을 하고 있다. 나는 동생의 미소가 가면처럼 낯설지만, 사람들은 동생의 희고 가지런한 이를 좋아한다. 화장실 앞에 서서 집을 둘러본다.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 문득, 옥상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느낀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에 오르자 지붕을 쿵쿵 울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덜 뜬 해의 희미한 빛이 아빠의 머리카락과 볼과 등에 내리자 눈이 부셨다. 실눈을 뜨고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춤을 추고 있었다. 아빠의 팔과 손과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2029년 수학능력시험 구술심층면접 실전예상문제집>이 한 장 씩 뜯겨 내 발 위에 떨어졌고, 사료 냄새가 아닌 아침의 바람이 옥상 위에 풍겼다. 일류 대학에 맞는, ‘사’자 직업에 맞는 만점짜리 답변들이 시든 꽃잎처럼 하얗게 쌓이고 있었다.
“당신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솔한 대화입니다.”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은 누구입니까?”
“17대 대통령을 가장 존경합니다. 소신 있는 정책을 통해 권위주의와 지역주의를 타파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몸부림에 가까운, 우스꽝스러운, 처절한 아빠의 몸짓을 보았다. 그것은 춤이었다. 옥상 저 멀리서 해가 뚜렷해지고 있었지만, 아빠에게 공장에 왜 가지 않느냐고 말할 수 없었다.
김경수┃국문·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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