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변호사, 대통령까지
민주화·지역주의 타파·대북 관계 매달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이 전해진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세상과 이별했지만 그 분의 치열하고도 소신 있는 삶은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와 함께 걸어 온 길고도 짧은 노 전 대통령의 63년 생을 따라가 봤다.


그는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빈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진영대창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경제적 어려움 속에 진영중학교에 입학했고, 공무원 준비를 하다 3년 장학생 제안을 받고 부산상업고등학교 취직 반에 진학했다. 3학년 말 중소기업에 취직했으나 사법고시에 뜻을 두고 한 달 반만에 퇴직한 후 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토담집을 짓고 고시공부를 하다 1968년 육군 현역으로 입대했다.


제대 후 그는 고시공부에 매진했으며 고시공부 중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 씨와 1973년 1월 결혼했다. 두 차례 낙방 끝에 결국 1975년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해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고, 7개월 뒤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1년 부산지역 민주 인사 탄압사건인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뒤로 학생, 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변호에 목소리를 내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특히 1987년에는 대우조선노동자 사망사건에 연루돼 제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항쟁 뒤 그는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다.


정치권에 입문 후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의 청문회 때 논리적인 질문과 격정적인 발언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1990년 3당 합당 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하고 신민당에 합류해 지역감정이 깊은 부산에서 14대 총선, 부산광역시장 선거, 1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선거에서는 졌지만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그의 소신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을 가져다 줬으며, 2000년에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팬클럽이 결성돼 역대 대통령 중 유일무이하게 팬클럽을 보유한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0년부터 2년 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서민 대통령의 인생은 바람 잘 날 없었다. 탄핵정국과 여당 내부 분열 등으로 주요 언론의 표적이 됐으며, 4년 연임제 개헌 제의도 역시 한나라당의 거부로 뜻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집권 초부터 권력 분산과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을 강조했고, 남북 화해협력 관계 정립에 매진,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퇴임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며 봉하 마을로 귀향해 친환경운동을 실천하는 등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서민의 삶을 살려했다. 그러나 후에 불거진 박연차 뇌물 사건 등으로 자신이 늘 강조한 도덕성을 잃자 지난 23일 모든 것을 내려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장예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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