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싱그러움을 노래하는 계절이다. 캠퍼스에는 젊은이들의 함성과 웃음, 노래들로 가득하다. 봄도 느껴보고 책도 살 겸해서 이른 아침에 학교에 왔다. 밤사이에 비가 왔나보다. 거친 땅위에 하얗게 떨어진 꽃잎을 무심히 밟으며 구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말라빠진 꽃다발이 놓여있는 이세종묘를 바라보자니 가슴이 울컥했다.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학생회관에서 신군부는 물러가라고 단식농성을 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날 밤, 기자인 형으로부터 급히 피하라는 연락을 받고 산으로 피신했던 일, 남아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들이 어제 일과 같다. 정의와 자유를 외치다가 꽃잎처럼 흩어진 그의 모습을 더듬어 본다.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살아 있는 자는 눈부신 꽃도 보고 봄이 왔다고 가슴 설레이며 교정을 거닐고 있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구나. 이 이른 아침에 무엇을 하러 이곳을 걷고 있는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때 내 모습, 삶에 대한 고뇌가 생각난다. 서울의 봄, 4학년인 나로서는 진로를 위해 공부하여야 하는데 시절이 도서관에만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메케한 최류탄 가스, 곤봉에 맞아 피 흘리는 친구들, 이러한 와중에 우리 모두는 투사가 되었다. 데모가 한창일 때, 교회 청년회장들이 중심이 되어 학생회관 2층에서 단식시위를 하고 있었다. 교회 장로이신 아버지께서 나를 데리러 그곳에 오셨다. 네가 이 짓을 하고 있으면 장래는 어떻게 되며 또 공무원인 형들에게도 피해가 가니 그만 가자하신다. 그 때,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위선자다. 장로님이 믿고 기도하는 신앙이 이정도 이시냐. 내가 믿고 생각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라고 대들었다. 격노한 아버지가 뺨을 한 대 갈기시고 집으로 가셨다. 그 후에도 아버지의 이중적인 태도, 즉, 남들에게는 헌신적인 사랑, 자식들에게는 엄하고 기복적인 행동에 대하여 많은 갈등이 있었다. 어느덧, 대학생인 아들 둘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그 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내가 모진 말을 하였구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한 놈이구나.

연구실에 돌아와서 신영복교수의 ‘처음처럼’이라는 책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학교에 온 것은 학생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기 위함이다. 지금도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자식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축복의 기도를 기도하신다. 또한, 엄하시지만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자식들 자랑이 남다르시다. 아직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자식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신 것 같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질책하는 호랑이 같은 교수가 될 것이다.

직장에 다니는 대학원 학생이 출석문제로 연구실에 찾아왔다. 빈손이었다. 장학금까지 받은 녀석이, 괜히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아들에게만 “너는 똑바로 살아라.”고 나무랐다. “상담하러 교수님을 뵐 때는 빈손으로 가지 말고, 아버지 욕 먹이지 말아라.“고 당부한다. 봉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마시는 100원짜리 따스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 집에서 못 가르치면 나라도 하련다.

왜 나는 꼰대이고 학생들은 내 자식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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