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행상여인의 애틋한 비밀이야기
국문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
시조의 원형, 후대 시에 다양한 영향

최근 고전이 ‘흘러간 삶의 흔적’이 아닌 ‘오래된 미래’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고전읽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혹시 당신은 고전 작품을 진지하게 음미해 본 적이 있는가? 전북대신문에서는 ‘名品 고전 다시 읽기’라는 기획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고전들을 되새겨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엮은이 밝힘>

어릴 적 끊임없이 나만 따라오며 나를 감시했던 달님은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롯한 동화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는 심각했었다. 달님은 나만 따라 다녔던 것이 아니라 만물에게 그 빛을 전해 주었을 것이다. 삶에 지친 자, 한 밤에도 고단한 노동을 해야만 하는 자, 꿀 맛 같은 잠을 청하는 자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밀어를 나누는 머리 위에도 달님은 어김없이 보석같은 빛을 발했으리라. 여기에 우리의 문학사상이 빛을 발하는 애틋한 밤 풍경을 그려보자.

 

 

달하 노피곰 도 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l를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l졈그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는 현재까지 가사가 전하는 유일한 백제의 가요이자 국문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노래이다.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속악(俗樂)의 가사로 불렸던 이 노래는 고려사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와 동국여지승람 권34 정읍현고약조(井邑縣古躍條)에 작품의 제작경위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악학궤범권5 시용향악정재도의조(時用鄕樂呈才圖儀條)에는 가사와 연행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이 노래는 백제의 민요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문으로 표기된 것으로, 내용 분석에 있어서 작품의 언어로 쓰인 고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읍의 한 행상인이 행상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기에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을 가다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전한다. 이러한 틀을 토대로 다양하게 변주하는 해석의 관점은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순박하고 지순한 사랑의 마음에 이르러 공통된 견해를 도출한다.

또 다른 해석의 틀은 바로 달이다. 달님이 어두운 온 세상을 밝히고 있다. 한 여인이 마을로 들어오는 어귀가 잘 보이는 언덕에 올라 어느 한 곳을 주시한다. 그녀는 이내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다. 사랑하는 임이 떠났던 그 길 위에 다시 그가 온전히 돌아오기를 허공 중에 흩어질 기원을 달님을 향해 보낸다. 사랑하는 그가 어두운 길에서 헤매지 않도록, 혹에 ‘즌 l’를 디디지 않도록, 삶의 무게만큼 무거운 행상을 어디든 놓고 편히 쉬었으면, 그가 가는 곳은 내가 있는 이 곳일진대 날이 저물어 오늘 오지 못하면 어쩌나. 이러한 염원들이 달님에게 올라가 다시 그녀의 기원이 미치는 곳으로 전해질 것이다.
이 작품의 매혹은 전통적인 여인상으로 표상하는 순종, 희생, 사랑, 인고의 미덕 등을 소유한 가부장제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결코 아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이 주는 아름다움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는 정서의 폭과 깊이가 달이라는 원형 상징과 결합하는 절묘한 기법이다.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자 미망인 ‘사랑’과 오늘밤에도 여전히 떠오를 ‘달’의 상징적 만남은 이 작품의 서두에서 시적 화자가 ‘하’라고 부르는 호명에서 비롯된다.

문학적 상징으로서의 달은 차고 기울고, 분리와 합일, 충만함과 이지러짐을 내포하는 이미지이다. 해와 달리 달은 어둠 속에서 존재하는 빛이자 삶의 어둠으로부터 구원, 희망, 긍정, 지혜 등을 상징한다. 따라서 어두운 한 밤 중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달밤은 은밀하고 더욱 내밀한 시적 자아의 풍경을 그려내는 시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달님이시여, 달님이시여 더욱 더 높이 솟아 더 밝은 빛으로 내 사랑하는 님의 길을 보존하소서.” 우리네 어머님이 자식의 안위를 정화수에 넣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하이얀 사기그릇 속 달님이 흐리듯, 행상 떠난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는 그녀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기원이 남편의 귀갓길을 밝히는 등대가 되어 그들의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이 고전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다양하다. 정읍사가 현전하는 백제 유일의 작품이라든가 국문 최초 혹은 후렴구를 제외했을 때 시조의 연원으로 보는 의의, 고려가요나 황진이의 시조와의 연관성 등 지속적 존재감을 통해 고전시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초혼」)을 허공중에 되뇌여야 했던, ‘죽어도 보낼 수 없다’(진달래꽃)는 지독한 역설에 놓인 김소월의 시적 화자로 부활하기도 하고, 박목월의 「달」과 이호우의 「달밤」에 형상화된 밤 풍경으로 다시 그려지곤 한다. 혹여 만해의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님의 침묵을 싸고 도는 그리움을 그녀를 통해서 본다면 비약일까. 오늘밤에도 ‘달님’은 필경 높이 떠올라 나만 쫓아올 것이다.

노영무┃국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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