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공원지비 등 전주도심 친일잔재 여전
지난 2006년…안내문 설치 친일청산 노력
일상에서 공존하는 치욕의 역사 되새겨야

지난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가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무단통치와 말살통치를 통해 우리민족의 정체성까지 빼앗으려던 일본은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수많은 친일잔재를 우리 땅에 남겼다. 이에 전북대신문에서는 전주 도심에서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친일잔재를 알아보고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엮은이 밝힘>

 

전북대학교 덕진공원지비
우리학교 제 1학생회관 옆 휴식공간에는 우리지역의 대표적 친일인물로서 여산군수와 전주농공은행장을 지냈던 박기순을 찬양하는 비석인 ‘덕진공원지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지난 1929년 10월 덕진공원과 덕진운동장 건설에 일조한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34년 전주읍장이었던 후지다니 사쿠지로의 명의로 세운 기념비다. 학생회관 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덕진공원과 운동장의 입구였지만 지난 1949년 우리학교가 세워지고 운동장부지가 학내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덕진공원 취향정·취향비
친일인물 박기순은 덕진공원지비 이외에도 자신의 회갑기념으로 덕진공원 내에 연꽃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정’과 ‘취향비’를 세웠다. 자신의 지인들과 시회와 잔치를 벌이기 위해 만든 사유물이었던 취향정은 비교적 아담하게 지어졌지만 내부 천정 주변에는 축시를 새긴 편액들로 가득해 당시 막강한 세력을 지녔던 친일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정자는 지난 1945년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돌아왔다.


 다가공원 전주신사 터
전주시 중화산동에 위치한 다가공원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황실의 조상이나 고유 토속신, 국가에 공로가 큰 사람을 신으로 모셨던 전주신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난 1957년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전주시 출신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호국영령탑 앞에는 옛 일본신사의 지주석이었던 석조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석조물의 상단모양은 사각의 뿔각 형태로 돼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석조물에 보이지 않는 일본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초등학교 봉안전 기단부
전주시 태평동에 위치한 전주초등학교에는 일본 천황의 사진을 보관했던 건물인 봉안전의 기단부가 남아있다. 봉안전은 일제강점기 시절 황국신민화 정책에 의해 만들어져 학생들이 일본 천황의 얼굴을 기억하게 하고 식민주의 정신을 교육하는데 이용됐다. 광복 후 정부의 주도로 일본 지배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신사를 비롯한 지역내의 사찰들을 철거했다. 그러나 전주초등학교의 봉안전은 기단부분이 유지된 채 지난 1945년 11월 독립기념탑이 세워져 현재까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해방 후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친일잔재 청산은 1948년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면서 처음 시작됐다. 그러나 친일파와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1년 만에 와해되는 비운을 맞았고 이후 정부의 친일잔재 청산 작업은 이로부터 66년이 지난 2005년에 이르러서야 대통령 소속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가 설치되면서 재개됐다.

도내에서는 지난 2005년 7월 민족문제연구소를 포함한 시민사회단체 33개가 모여 ‘친일청산을 위한 전북시민연대’를 발족하고 전주시와 함께 친일청산 작업을 진행했다. 이로써 지난 2006년에 덕진공원 취향정과 다가공원 전주신사 터, 전주초등학교 봉안전의 기단부 옆에 친일 유래를 알리는 안내문을 설치했다. 그러나 우리학교 내에 자리잡고 있는 덕진공원지비에는 안내문이 없어 많은 학교구성원들이 친일잔재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최재흔 지부장은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에는 친일파를 비롯한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며 “대학생들이 주체가 돼 비판의식을 갖고 잘못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언행일치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승훈 기자
psh0504@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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