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 하고,
       누구는 그를,
       사람도 아니라고 한다.
       어떻게 이 사람에게는 그렇게 좋은 면만을 보였고,
       어떻게 저 사람에게는 그렇게 나쁜 면만을 보였을까.
       그리고 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하지 못하는 나를 가지고,
       저들은 나를 답답해하고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한다.
       그래도 내가 끝내 그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은 내 고집 같으다.


대학에서 총학생회장선거와 총장선거는 중요한 행사다. 총학생회장선거는 알 수 없지만 총장선거는 선거권을 가진 구성원으로서 내게도 접하게 되는 일들이 조금은 있고 그것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투표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까. 아마 후보자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 는 속담처럼 그것을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쉬운 방법으로 투표를 결정한다. 학연, 지연 등에 따른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그 쉬운 방법의 하나이다. 양심과 이성의 반론에 대한 변명으로는 앞의 속담이 있다. 그렇게 매번 선거를 치르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인가에 대한 일말의 의문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중에 하나는 진실성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진실로 표현 할 때 우리는 친근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살면서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생하는가. 수도사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우리 속세의 중생들은 각종 욕심과 시기심으로 인하여 진실성을 가지기 어렵다. 욕심과 시기심을 포기하면 진실성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한다. 바보를 각오하고 진실성을 갖는 것은 그러므로 큰 용기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바보들이, 그런 귀한 바보들이 있기는 했다. 우리대학의 선거에서도 그런 바보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가.  대학은 물론 수도원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대학이 일반 사회와 같다고 할 수 도 없다. 수도원에는 그의 삶을 신에게 바치는 수도사들이 있다. 대학에는 그의 삶을 학문연구에 바치는 학자들이 있다. 신과 학문은 속세에 필요한 중요한 요소이지만 속세가 주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속세는 다만 그들의 선물을, 열매를 받아먹을 뿐이다.

 대학의 사명은 연구, 교육, 사회봉사이다. 이것은 지식의 생산과 전달 그리고 응용을 말한다. 오늘날 대학은 지식의 응용에 의한 사회봉사를 강조하면서 세속화되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지식의 응용은 지식의 생산 즉 학문연구를 전제한다. 지식의 전달인 교육도 마찬가지로 학문연구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학문연구는 대학의 가장 큰 목표이다. 학문연구는 자유로운 사고와 순수한 창의성이 바탕이 된다. 일반사회는 전통과 관습 안에 있지만 대학은 전통과 관습의 틀을 넘어서 그것을 평가하고 조정하고 안내한다. 대학이 일반사회와 구분되어야하는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고 싶다.

 대학이 일반사회와 다르다면 대학의 선거도 일반사회의 선거와 달라야 한다. 무엇이 달라야 할까. 일반사회는 그렇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우리대학이 이번 선거에서 바보를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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