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호 프리랜서 작가
나는 전형적인 입시실패자다. 수능은 상위 5% 성적을 기록했지만 지원에 실패했다. 지금도 가끔 미련이 남아 주변 지인들에게 그 당시 점수로 입학 가능했던 학교 및 학과를 이야기하면 대부분 경외의 표정을 지으며 놀란다. 학력이란 그런 것이다. 당시 나는 그것이 갖고 싶었다. 부러워할만한 학력. 무너져있던 자존감을 채워줄 외피가 필요했다. 하지만 실패했고 갈 길을 잃었다.
“어디를 가든 네가 잘하면 된다”는 부모님의 훈화에 난 일단 학교를 다녀보기로 했다. 두 번째 문제가 있었다. 학과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막살아보자 내가 하고 싶은 거 해보자 해서 들어간 곳이 대학교 신문사였다. 글을 쓰고 문자화된 내용이 공식적인 인쇄물로 남는다는 것이 멋있어보였다. 네 번의 학사경고를 맞는 동안에도 신문사는 그럭저럭 다녔다. 그때 배운 일들이 내 유일한 경력이 될 줄은 몰랐다.
실패와 자기파괴, 방황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건은 국회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선거일을 돕게 되어 5개월 만에 후보자가 당선 됐다. 선거공보물 제작을 위해 서울에 갔다가 찬란한 국회 야경을 보며 저기에서 꼭 한번 일해보고 싶다고 다짐했다. 열심히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7급 비서로 일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정치의 현장 속에서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신입이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주말이라고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고 새벽까지 야근을 하는 날에는 사무실이 욕설로 가득차기 일쑤였다. 어느새 주변의 직장 동료들은 갈아치워져 있었다. 근무환경의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병을 얻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었다. 이미 십수명이 교체된 2년 1개월이 지나고 나서 오래 버텼다고 자위하며 그만두었다. 꺾인 꽃처럼 고개를 숙이면 참기 힘든 억울한 마음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정신병만이 남아있었다.
다시 갈 길을 잃은 나는 중퇴상태였던 학교를 졸업하기로 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심리학 전공수업을 듣게 된 나는 학교에 다니는 의미를 알게 됐다. 그 신박하고 놀랍고 즐거운 경험은 여태까지의 삶 속에는 없었던 일들이었다. 결국 졸업 후 2년이 지나 38살 때, 관련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정하고 원서를 넣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누구나 방황할 수 있다. 혼자 어찌 해결해 보려하다간 그 방황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 학내외의 기관, 선후배 등 생각해보면 조언을 얻을 곳은 많다. 나 역시 생각한다. ‘진로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좋은 대학과 학과를 향한 허영심이 실패하더라도 전과라도 했다면 즐거운 나날들이 훨씬 빨리 왔을 것’이라고.
이미 시간은 흘렀다. 무엇인가를 깨달아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고 행복이 찾아오면 좋겠지만, 지금의 내 삶은 이제 막 새로운 길로 들어서는 첫걸음을 떼어놓은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그조차 불안불안하다. 그러나 20살 그때처럼 막막하지는 않다. 할수록 즐거운 공부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들 덕에 긴 터널의 끝이 희미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