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후, 허허벌판 같은 캠퍼스서 대학 생활
시국사건 1호 변호사, 잊을 수 없는 인혁당사건
2016년도 촛볼 민의, 남다른 감회를 갖고 지켜봐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 땅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전쟁을 핑계 삼은 정치적 독재가 법치주의를 무너뜨렸다. 국민을 위한 사법(司法)이 아니라 독재의 화신인 집권자를 위한 사법(私法)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조리가 분야마다 넘쳐났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국민의 저항은 탄압의 대상이 됐다. 악법과 위법(僞法)이 억울한 전과자를 양산했고 정의로운 언동이 고문과 추방의 대상이 됐다.
한승헌(정치외교‧57년 졸) 변호사(감사원장 역임)는 이러한 세상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핍박을 받거나 사회적 약자로 고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잘 나가던 검사직을 사임하고 변호사가 됐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은 그의 성품도 여기에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한 변호사는 변호인석에만 조용히 앉아 있지 못했다. 거친 사회현실 속에 뛰어들어 억울한 사람들과 함께 분노하고 싸웠다. 그러다 끌려가기도 하고, 고문도 당하고, 두 번에 걸쳐 총 22개월 간 징역살이도 했다. 그런가 하면,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감사원장도 하고, 사법개혁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 했다.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한 한 변호사는 지금의 대학 캠퍼스가 자신의 재학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가 우리 대학에 다니던 때는 6‧25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직후여서 그 당시 학교는 단층 건물 몇 채가 전부였고, 주변은 대부분이 허허벌판이었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설과 제도가 미흡했다”며 “그처럼 처량하던 캠퍼스가 이렇게 바뀔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혼란이 휩쓸던 시절인 만큼 한 변호사의 학창 시절은 가슴 아픈 기억들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는 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6‧25전쟁으로 온 국토가 전장의 포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대학 4년간 내내 6‧25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아 나라가 온통 어수선하고 궁핍하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또는 우직하게 학업을 이어나갔다.
처음부터 법조인의 길을 걸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사, 아나운서, 언론인 그 다음으로 희망했던 것이 법조인이었다. 말하자면 4순위였던 직업이 한 변호사에게 평생의 천직이 된 셈이다.
휴전 직후인 그때도 취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앞으로 먹고 살 문제를 걱정하던 중 ‘고등고시 합격하면 취직 걱정은 면한다’는 새삼스런 말에 끌리어 그 길로 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첫 번째는 낙방을 하고, 졸업 직전에 합격 통보를 받은 그는 4.19 후 군법무관 근무 3년 반을 마치고 검사가 됐다. 그로부터 5년간 법무부와 서울지검 등에서 근무한 한 변호사는 자기 적성을 살려서 일할 수 있는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고 검찰을 떠난다.
그는 험난하고 위험이 따르기 쉬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그 시절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탄압이 난무하던 때였다. 재판도 법률에 합당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그럴수록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법치주의를 살려내는 데 일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상했다.
결심한 후 한 변호사는 일반 변호사들이 맡기를 꺼려하는 시국 사건을 100건 넘게 변호했다. 한 변호사는 그런 사건을 변론했을 경우의 개인적인 피해나 위험 등은 염두에 둘 경황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서 ‘특정 사건만은 변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위험할 것 같다’ 등으로 변호를 만류했고, 그때마다 그는 그런 말을 전하는 사람들을 고맙게 여기면서도 그 권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한 변호사를 ‘시국사건 1호 변호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 변호사는 많은 수임 사건 중에서도 1974년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이 특히 잊히지 않는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 개정운동을 처벌하기 위한 긴급조치 1호에 이어 나온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사건으로,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을 그 배후로 지목했다. 그런데 그 형량이 터무니없이 가혹해 사형수가 7명이나 나왔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 기각 판결이 나오자 8시간만인 그 다음날 새벽에 사형을 집행했는데, 거기에 그 민청학련사건에 들어있는 여정남이 포함돼 있었다. 여(呂.)군은 한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던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의 젊은이였다.
‘사법살인’이 자행되던 그날 새벽, 한 변호사도 반공법 위반으로 같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채로 새벽잠을 자고 있었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탄압이 정권의 지배수단이 돼있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한 변호사는 지난 2016년의 촛불집회를 남다른 감회를 갖고 지켜봤다. 그는 “국민적 항쟁을 통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저력을 온 세계에 보여줬다”고 평가하며 “그만한 질서와 평화를 지켜내면서 새로운 민주정부를 창출할 수 있어 매우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에게 우리 사회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했다. 한 변호사는 “법조인이 되면 흔히들 성공하고 출세했다는 말을 듣는데, 거기에 안일하게 멈춰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재야 민주화운동과 시민사회단체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해왔고,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도 원로 선배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젠 고령에 접어들어서 대학 강의는 그만뒀지만, 저술활동은 여전히 왕성하다. 그동안 쌓인 장서는 이미 여러 해 전에 모교 전북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산민문고(山民文庫)’를 개설, 기증한 바 있고, 민주화운동 관계 자료는 <친일인명사전>으로 유명한 ’민족문제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서도경기자 dgseo611@jbnu.ac.kr